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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an 21. 2021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밤나무를 생각해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가에 가만히 서 있어 본 사람은 안다.


분명 나는 가만히 멈춰 있는데, 바닷물이 발끝을 건드렸다가 이내 바다 쪽으로 다시 멀어지는 걸 보면, 마치 내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나를 끌고 가듯이, 너무나 매끄럽게 뒤로, 더 뒤로.


그런 착각에 사로잡혀서 멍하니 서 있으면, 어느새 뿌리를 내린 식물처럼 두 발이 모래에 뭍혀 사라지고 만다. 그리곤 내 두 발이 아직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가락을 움직여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무언가를, 놓쳤다는 생각. 어딘가에, 늦었다는 생각.


사실 무언가를 갖기도 전에 잃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한데도, 마법의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을 얼마든지 가능하게 한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단순히 개인이 어리석기 때문은 아니다. 개인은 불완전한 인간일 따름이고, 누구나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 불행해진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계급을 만들며, 남들과의 비교를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네가 꿈을 꿀 때 다른 사람들은 꿈을 이루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으며, 네가 가만히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움직여 부자가 되고 있다고. 다른 사람이 나아가는 만큼, 너는 가만히 서 있어도 뒤로 가는 거라고. 네가 모르는 사이 너만 빼놓고 모두가 어딘가로 열심히 나아가는 중라고-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인다. 그렇게 앞서 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만 홀로 뒤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들 때가 있다.


21세기 들어서 그런 마음을 일컫는 용어도 생겼다. 포모(FOMO) 증후군. ‘Fear of Missing Out’의 약자로, 놓치거나 제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즐거움과 행운이 자꾸 자신을 행복 밖으로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누구나 잘 살고 싶어하는데, 그런 마음이 크면 클수록 두려움도 커진다.




살면서 ‘늦었다’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은, 임용고사 공부를 시작한 시기였다.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그랬다지만, 공부를 시작할 당시에는 이미 교사가 된 후배나 친구들도 있었고, 취업을 한 친구들도 많았다.


한번에 합격이 되면 좋지만, 혹시, 공부를 더 오래 해야 한다면? 두려웠다. 내가 너무 느리게 사는 것 같아서 자꾸 마음만 동동거리고 혼자 저 멀리에 앞서 나가 움직이지 않는 나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때 공부를 하다가 한 문제집*에서 밤나무 이야기를 만났다.




  성 안에 있는 집에서는 밤나무를 심는 사람이 적은데, 윤 공은 집을 구할 때마다 밤나무 있는 곳을 선택했다. 그는 일찍이 나에게 말했다.


“봄에는 잎이 무성하지 않아 가지 사이가 성글어서 그 사이로 꽃이 서로 비치고, 여름이면 잎이 우거져서 그늘에서 놀 수가 있으며, 가을에는 밤이 먹을 만하며, 겨울이면 밤송이를 모아 아궁이에 불을 땔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밤나무를 좋아한다.”


  나는 말한다. 불이 마른 것에 잘 붙고 물이 축축한 곳으로 흐르는 것은, 성질이 같은 것끼리 서로 찾아가는 것이니 이치에 있어서 반드시 그러한 것이다. 대게 그 숭상하는 것이 같으면 물건이나 내가 다를 것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나는 풀이나 나무가 모두 한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뿌리와 싹과 꽃과 열매가 어려운 것, 쉬운 것, 일찍 되는 것, 늦게 되는 것 등 가지각색인데, 오직 이 밤나무는 모든 나무 가운데서 가장 늦게 나며, 재배하기도 어렵고 기르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러나 자라기만 하면 쉽게 튼튼해지며, 잎이 매우 늦게 돋지만, 돋기만 하면 곧 그늘을 쉽게 만들어준다. 꽃이 매우 늦게 피지만 피기만 하면 곧 흐드러지며, 열매가 매우 늦게 맺히지만 맺히기만 하면 곧 수확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밤나무는 모든 사물에 공통되는 차고 이지러지고, 줄어들고 보태는 이치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윤 공은 나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했는데 그때의 나이가 30여 세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4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갔으므로 사람들은 모두가 늦었다고 하였으나, 공은 직무에 더욱 조심하며 충실히 했다. 그러다가 임금의 인정을 받아 등용되었는데, 하루 동안에 아홉 번 자리를 옮겨 대신의 지위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별로 손질을 하지 않았는데도 무성하게 뻗어 나간 밤나무와 같다. 그 기틀을 세우는 것이 처음에는 어려웠으나 그 성취하는 것이 뒤에는 쉬웠으니, 이것은 밤나무의 꽃과 열매의 성질과 같은 바가 있다.


-백문보(1303~1374), <율정설(栗亭說)>

*EBS 수능완성(2016)

 




생명의 속도는 가지각색이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살아간다. 당신이 경험한 모든 것은 당신만의 나이테가 되어 쌓였으리라.


불이 마른 것에 잘 붙고 물이 축축한 곳으로 흐르는 것은, 성질이 같은 것끼리 서로 찾아가는 것이니 이치에 있어서 반드시 그러한 것이다. 대게 그 숭상하는 것이 같으면 물건이나 내가 다를 것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편 당신은 무엇을 숭상하여 무엇을 찾아가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밀어낸다기 보다는, 사실 스스로 행복 밖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자라기만 하면 쉽게 튼튼해지며, 잎이 매우 늦게 돋지만, 돋기만 하면 곧 그늘을 쉽게 만들어준다. 꽃이 매우 늦게 피지만 피기만 하면 곧 흐드러지며, 열매가 매우 늦게 맺히지만 맺히기만 하면 곧 수확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밤나무는 모든 사물에 공통되는 차고 이지러지고, 줄어들고 보태는 이치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꽃은 소리없이 핀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꽃이 피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존재하며, 적절한 시기에 주어지는 물과 바람 그리고 햇빛도 필요한 것이다.


어쨌거나 인간은 희망 없이 살 수 없다. 동시에 인간은 자꾸 잊어버리는 생물이라서, 주기적으로 상기시켜줘야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진 상상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밤나무를 생각하겠다.


아마도 내내 아무 말 없을 밤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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