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내 방은 좁다. 침대와 책상, 책꽂이 그리고 옷장이면 절반 이상이 꽉 찬다. 거기에다 피아노까지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문에서 침대로 향하는 좁은 길만 간신히 나있다.
오래된 피아노, 좁은 방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한 달에 한번 칠까 말까 한, 갈 곳 잃은 책들이 의자에 쌓여 있는 피아노. 누군가는 내게, 버리는 것이 낫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것을 버릴 생각이 없다. 그것엔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옛날엔 매일 피아노를 연주했다. 친척 중에 피아노를 가르치는 분이 계셔서 초등학생 때부터 그분께 배우러 멀리까지 다녔다. 나름 어느 대회에 나가서는 상을 타기도 하면서,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주변의 말에 귀가 팔랑여 예술중학교 입학시험 준비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꼼짝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몇 시간 동안이고 입시곡만 연습하다 보니, 지겨움이 흥미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런 힘듦을 표현하기 위해 악보 위에다 ‘엄마 사랑해요(였는지 ‘미안해요’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를 흐릿하게 적고, ‘요’의 끝부분을 밑으로 힘없이 주르륵 떨어뜨려서 마치 너무나 힘든 연습 끝에 그걸 쓰고 쓰러져 잠든 것처럼 연출했던 기억도 난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출한 그 비극적 장면은 정작 부모님의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했지만.
이상한 것은 막상 부모님이 그래, 그렇게 힘들면 이제 피아노 팔아버리고 그만하자! 라고 하면 아니야, 아니라고! 계속할 거야! 하면서 엉엉 울며 피아노를 지켰다는 것이다. 피아노는 내게 애증의 물건이 되었고, 나는 결국 시험에 떨어졌다. 별로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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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중학교 1학년 초반까지는 당연히 예술고등학교를 가겠다며 계속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사실은 그럴 재능이나 실력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딱히 내가 무엇을 더 잘하는지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당시 내가 피아노를 치면 모두들 ‘우와 잘 친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달콤해서 좋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누가 잘 먹는다고 칭찬을 하면 배가 터질 것 같아도 한 숟갈 더 입에 밀어 넣고 음식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는 아이였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다 보니,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얻는 수단이 피아노 말고도 하나둘 생겼다. 게다가 더 어려운 악보에 도전하면 할수록 항상 내 손가락은 삐끗하며 다른 음을 짚기 일수였다. 그렇다고 더 열심히 연습할 의지도 없는 내 실력이 자연스럽게 퇴보하면서 피아노에 대한 나의 관심도 시들해져 갔다.
결국 나는 피아노 배우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피아노는 어린 내 인생에서 특별함을 잃고, 인생의 한 분기에서 도전과 실패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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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랬던 내가, 어떤 음악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에 진심으로 피아노를 좋아하게 되었다.
성함도 생김새도 이미 흐릿해졌지만, 항상 밝게 웃으시던 중년의 여자 선생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2학년이었는지 3학년이었는지, 쉬는 시간이었는지 점심시간이었는지, 어쨌든 나는 음악실에 남아 있었고, 선생님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자신의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는 내게 말씀하셨다. “나비야, 선생님은 피아노 치는 게 정말 좋아!” 고개를 갸우뚱하는 내게, 선생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음악은 정답이 없거든!”
음악은 정답이 없다. 그래서, 피아노 치는 게 정말 좋다! 음악 하시는 분들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 가슴에는 그 말이 가득 들어왔다. 그 말에는 반짝이는 삶의 약동과 생명력이 담겨 있었다.
그전까지 나에게 피아노 연습이란,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연주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실제로 입시 준비를 할 때는 녹음 파일을 들으면서 그것과 똑같이 치기 위해 노력했다. 인정이든 아니든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평가당하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고, 내게 음악은 맞고 틀린 것이 뚜렷하게 존재하는 세계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그 말씀은 내 시야를 넓혀 주었다.
물론, 악보에 있는 음정 박자 모두 무시하고 아주 제멋대로 치라는 소리는 아니다. 아무렇게나 쾅쾅 내려치면서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해도 좋다는 소리도 아닐 것이다. 그저, 음악을 한다는 것은 누가누가 정답에 가깝나 경쟁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연주에 진정으로 빠져들어서 즐기는 선생님의 그 모습에서 나는 자유로움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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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정답을 찾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음악 선생님의 그 말을 듣고 나니, 피아노 연주가 그렇게나 즐거워질 수가 없었다. 내가 나다움을 표현하는 그 모든 것이 자유롭게 허락되는 세계가 새롭게 열린 것이다. 내가 선생님의 모습에서 자유로움을 느낀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음악뿐만이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애쓰는 곳도, 남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있지도 않은 정답에 나를 끼워 넣으려 애쓰는 곳도 아니다. 어떤 완벽하고 이상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도 아니다. 다만 삶의 경이와 타인과 나를 발견하는 곳이구나. 그리고 좀 더 현명하고 나다운 선택을 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정답을 맞혀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자.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인생을 살자. 이러한 생각이 나를 나답게, 나를 나로서, 소중히 대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이후 청소년기의 나는 여러 가지 고민으로, 인간관계로, 시험으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힘들 때마다 피아노를 쳤다. 그러면 정답이 아니라, 나 자신을 찾는 것 같았다.
지금은 이래저래 일상이 바쁘고, 다른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피아노를 자주 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피아노 치는 것이 좋다. 피아노를 볼 때마다, 혹은 아주 가끔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그때 그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그 피아노를 버리지 못한다.
결국 나다운 것은 나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Sein heisst Werden, Leben heisst Lernen.
(존재한다는 것은 되어가는 것,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
Wenn du das gold von den Sternen suchst,
(네가 별로부터의 황금을 찾으려면)
musst du allein hinaus in die Gefahr
(너 혼자 위험 속으로 향해야 한단다.)
-뮤지컬 <모차르트!> 중 ‘황금별(Gold von den Sternen)’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되어가는 것,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 그러니까 ‘나다움’도 살면서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피아노를 버리게 되는 날도 올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영원하지 않은 것엔 나 자신도 포함된다. 나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어떤 방향으로든 변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인생엔 정답이 없으니까. 어쨌든 용기를 가지고, 그 과정을 즐기며 배우면 된다. 그러면 나만의 황금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은 오랜만에 피아노를 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