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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Aug 17. 2020

오오냐 오냐, 괜찮다, 괜찮다.


동해 할아버지는 항상 집에 가고 싶어 하셨다.


집에 가자, 이제 집에 가자. 그러실 때마다 우리는 예, 가요, 저기 간호사한테 말하고 가요, 먼저 이거 다 드세요,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크림빵, 홍시, 요거트, 바나나 우유 따위의 음식을 함께 나눠먹다가 간호사분께 몰래 ‘저희 갈게요’하고 속삭이고는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다.


동해 할아버지는 2010년 봄부터 2016년 겨울까지 요양원에 계셨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셨던 첫 해는, 내가 대학에 들어간 첫 해였다. 그때 할아버지는 대번에 대학에 간 손녀 얼굴을 알아보시고 악수를 청하셨다. 그런데 나의 손을 잡자마자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는 통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 투박한 손을 한동안 놓지 못한 채로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 한해, 한해, 지날 때마다 동해 할아버지는 기억의 가벼운 짐부터 하나씩, 하나씩, 벗어던지셨다. 어느 해의 할아버지는 이모와 엄마의 이름을 헷갈려하셨고, 어느 해 그의 기억 속에서는 엄마가 아직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학교는 다니냐, 응? 학교 안 빠지고 잘 다니냐? 엄마는 계속 물어보시는 할아버지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아버지 이것 좀 더 드세요, 하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홍시를 슬그머니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끝까지 내려놓지 않으신 것은 아내의 이름이었다. 언제나, 그의 아내는 알아보셨다.




2010년 이전, 내 기억 속의 동해 할아버지는 낮은 산 같은 분이었다. 아래로 완만한 등선을 그리는 눈을 제외하고는 얼굴도 몸도 손도 왠지 바위처럼 네모났다. 철도 기관사로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할아버지는 국가 유공자 배지가 달린 모자를 자랑처럼 즐겨 쓰셨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닌 기품이 있었다.


평소엔 말씀이 많지 않으셨지만, 한번 말씀을 시작하시면 조금 느린 강원도 사투리에, 어린 나에게는 사뭇 진지한 내용이 길게 이어져서, 귀담아듣지 않고 말씀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적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 진지함과 지루함이 오히려 재미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진지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은은히 미소 띤 얼굴로 항상 나를 귀여워해 주었다. 오오냐, 오냐. 할아버지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오오-냐 오냐 하고 대답해주셨는데, 그건 무조건적인 수용의 단어였다.


그 시절에는 강원도에 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어릴 때는 주로 방학 때 며칠씩, 부모님과 나 그리고 동생이 모두 휴가를 떠나듯이 강원도로 향했다. 아주 어릴 적에 무궁화호 기차를 탈 때에는 잠깐 뒤로 가는 구간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철컹- 쿠구궁- 쿠궁- 기차가 뒤로 가기 시작하면 어린 나와 동생은 신발을 벗고 올라간 기차 좌석 위에서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동해역에 도착하면 할아버지가 항상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가 갈 때마다 할아버지는 이모와 사촌 동생들 그리고 우리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니셨다. 모두 함께 계곡에 가서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굴다리 밑에서 컵라면을 먹는 재미는 어느 것에 비할 바가 없었다. 그럴 때 할아버지는 뒷짐을 지고 저 멀리서 우리가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런데 어디를 가지 않아도, 사실 나는 동해집 자체를 좋아했다. 엄마와 이모들의 풋풋한 대학 졸업 사진이 자랑스레 걸려있는 방이 좋았고, 마당의 텃밭과 닭장의 닭들이 좋았고, 동해 할머니 솜씨로 끓인 된장찌개도 좋았다. 집에 장난감 따위는 없었지만 아이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놀 거리를 만들어 내었고, 그렇게 사촌들과 모의 작당하여 놀고 있으면 나도 같이 놀아! 하면서 뒤늦게 울며 뛰어오는 막내 사촌동생도 좋았다. 동해 할머니와 동해 할아버지의 큼큼하지만 싫지 않은 냄새가 옅게 배어 있는 공간 구석구석 모두 좋았다.




항상 집에 가고 싶어 하셨던 동해 할아버지는, 2017년 1월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소식을 듣고서 밤중에 강원도로 출발하였고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현실감이 들지 않을 만큼 사방이 고요한 새벽이었다. 안에는 이미 눈이 발개진 이모들과 사촌 동생들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미 여러 해에 걸쳐서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온 것 같다는 기분도 들었던 것 같다. 바닥에 누워 엄마와 쪽잠을 잤다.


이 기간에 썼던 일기를 보면, 이때 ‘할아버지가 모두를 모아준 것 같다’고 쓰여 있다. 이모들과 사촌 동생들을 만나게 해 주었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공부에 입시에 다들 조금씩 멀어져 있었는데 다시 가까워지도록 모아준 것 같다고.


입관할 때, 엄마는 편안히 누워 계신 할아버지의 몸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다루듯이 정성스레 쓸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울음이 터졌다.




그때 나는 임용고시 2차 시험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함께 하지 못하고, 중간에 혼자 올라와야 했다. 가족들 모두 그렇게 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버스였나, 기차였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며칠이 뭐가 중요하다고, 가족들이 가라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것은 내가 아닌가. 시험 때문에 할아버지 곁을 끝까지 지키지 않고 나 혼자 간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 맞았던 걸까. 그래도 어떻게든 끝까지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죄책감에 올라가는 내내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오오냐 오냐, 괜찮다, 괜찮다.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동해 할아버지라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오냐. 그래, 네 마음 다 안다. 나는 신경 쓰지 마라. 다 괜찮다, 괜찮다. 라고 말해주실 것을 알았다. 또다시 눈물이 났다.


바로 그 해, 나는 2차 시험에 최종 합격하고 교사가 되었다.


그 후로 호국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찾아가 뵐 때마다 나는 마음으로 그때를 생각하며 인사를 드린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종종 생각한다. 만약 그 해에 내가 합격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할아버지는 괜찮다, 괜찮다 해주시지 않았을까.


뒤에 펼쳐진 낮은 산 같았던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 은은히 미소 띤 얼굴로 오오냐 오냐, 하고 말해주던 할아버지. 서울 할아버지와는 달리 일년에 몇번 찾아뵙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도 가끔 동해 할아버지의 기억이 파도처럼 돌아올 때가 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지금도 이렇게 말씀해주실 것 같다.


-오오냐 오냐, 괜찮다, 괜찮다.





(덧붙임) 지금의 나는 ‘외할아버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나의 ‘여성’ 양육자인 ‘어머니’의 가족이기 때문에 ‘친’과 구별되어 ‘바깥 외’가 붙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할아버지를 ‘지역’으로 구분하여, 외할아버지를 ‘동해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이전 글의 친할아버지를 ‘서울 할아버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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