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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착한 레몬 Jun 13. 2022

차곡차곡_글3

*차곡차곡은 양혜리작가와 내가 함께 쓰는 글이다

1.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던 요즘이었다. 내가 마주했던, 혹은 스쳐갔던, 혹은 지켜봤던 죽음들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분명히 괴로웠지만, 신기하게도 죽음을 생각할수록 사는 것에 대해 더 집요하게 말하고 싶어져서 한편으론 참 희한했다. ‘나는 수다쟁이지만 가만가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무엇보다 지치지 않았으면 하는데…’ 라고 속으로 다짐하던 중 카톡으로 ‘내 몸 바쳐’ 라는 단어가 전달되어서, 눈을 질끈 감고 웃어 버렸다.


몸 바쳐 일한 다는 건 무슨 소용인가 하다가도, 우리가 함께 보냈던, 함께 고민했던 시간들 사이에서 정성을 들였던 마음들을 떠올릴 때면, ‘이번 생은 망하더라도 이렇게 마무리 하자’라고 애써 마음먹으며, 최선을 다 했던 그 시간들을 애틋해한다.

*혹은 최선에 못 미치더라도, 애틋하게 바라보고 다시 따뜻하게 쓰다듬어 줄 수 있기를



2. 

주변의 많은 것들이 플랫해 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좀 더 얇게, 좀 더 가볍게, 좀 더 매끈하게 플랫해진 것들에게선 냄새가 나질 않는다. 무향, 무취의 깨끗함 같은 강박 사이로 컨템포러리라는 단어가 떠다닌다. 컨템포러리 하다는 것은 욕일까 칭찬일까. 거기 엔 어떤 냄새가 아니 체취가 아니 무엇인진 몰라도 짙은 것이 빠져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무언가가 베어 있다는 건, 시간을 들이는 것, 그리고 노력과 애정과 정성과 또 하나를 더해 관심까지도 얹어주고 그리 숨이 차지 않게 달려가면서 사실은 영원 속에 있는 것이라고 어쩌면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3. 

전시가 난해하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버려서 이젠 좀 식상할 지경인데, ‘난해’하다는 단어가 떠올랐던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러니깐 뭐가요? 정확히 어떤 부분이요?’ 라고 물으면 내가 만든 것들이 너무 정적이었거나, 불친절 했다는 식의 답을 들을까봐 굳이 묻지 않는다. 하얀 벽엔 꼭 무언가 걸려야만 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 벽을 차라리 부숴 버리는 편이 낫다고 말할 것 같다. (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나는 전시장의 고요함 그 정적인 느낌 사이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 말고, 가만가만 하지만 안으로는 엄청 고군분투 하고 있는 말하고 있는 무언가가. 



4. 

이번 전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생명이 자라나고, 싹을 틔우고, 그 안에서 생에 대한 고군분투가 자라나고 있다. ‘물을 하루 주지 않으면 이것들은 시들어 버릴까?’하는 잔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하루 이틀 물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그러지도 않았지만) 풀들은 눕지 않았다. 가만가만 잎사귀들을 들여다보니 정말 자라고 있었다. 돌본다는 건 곁에 가는 소리를 들려주는 거라고 했는데, 내가 너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는 거라고... 풀들을 들여다 볼 때마다 생명이란 이렇게 자라는 거구나 하고 느꼈다. 누가 봐주고 안 봐주는 시간에도 제 몫을 다해 부지런히 자라고, 환경에 휩쓸리는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서 제 몸으로 사력을 다해 제 모습으로 조금씩 자리 잡아 가는 것이라고 풀들은 알려 주었다. 



5. 

전시를 시작하기 전, 씨앗을 뿌리기 위해 두드렸던 흙의 촉감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흙은 차갑고 폭신했고, 자연스럽게 나는 ‘우리가 죽으면 이런 곳에 묻히게 될까요?’ 라고 물었고, 작가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은 사람의 피부 처럼요. 죽은 사람 살 만져본 적 있어요?’ 라고 말했다. 나는 만져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느낌을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는 전시장에 왜 흙을 가져와 둔턱을 만들고, 흙을 다지고, 씨앗을 뿌리는가. 아마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명을 이야기 하지만 그 기저에 있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우리 안의 두려운 것들과 마주하고, 그것을 입으로 굳이 말하면서 살고 죽는 것에 대한 다른 무언가 다른 눈과 귀와 입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기 때문일 것이라고. 어떤 날에 모여 앉아 죽음에 대해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가끔 웃기도 했던 우리들처럼 말이다.    



- 한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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