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침착한 레몬 Jul 13. 2022

차곡차곡_글4

*차곡차곡은 양혜리 작가와 내가 함께 쓰는 글이다

1. 참으로 기이한 것들이 많은 시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이미 늙어버린  같아 부끄럽기도 하지만, 깊게 파인 주름도 딱히 없이, 머리도 하얗게 바래지 않은 젊은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늙는 속도보다 기술의 속도가 한참 빨리 진화하고 있기 때문인  같다.

얼마 , Ai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던 어느 구글 직원의 말처럼(그는 구글을 그만두고 이를 매스컴을 통해 발표했다.) ‘기술이 빠르게 

달리는 자기 부상 열차라면, 우리는 아직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인가 ‘라고 생각하며, 지구인들이   있는 다른 행성을 찾느라 바쁜 일부의 사람들과 그와 중에도 우주에서까지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그리고 자꾸만 진화를 거듭해서 이젠 무리 없이 점프하고, 문을 열고, 여하튼 모든 몸동작이 대단히 자연스러워지고 있는 로봇의 다리를 보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싶다. (, 눈물 나네)



2. 동시대 예술에서 사진의 출현은  전환점을 가져왔다고   있는데, 대상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찍음으로 인해서 움직이는 이미지(무빙 이미지) 만들  있게 되었기 때문일  같다.  무빙 이미지는 미술에서는 미디어 영상 작품으로 회화가 가지고 있는 평면성에서 확장되어, 손쉽게 서사를 이야기하고, 벽면을 가득 채우는 혹은 바닥, 천장까지 뻗어나갈  있는 면들은 모두 뻗어나가는 방식으로 설치적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이제 영상 작업은 공간을 점유하는 이미지들 중에서 시각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  하나로 여겨진다. 이미지가 이어지고, 움직임이 만들어 지자, 이미지는 스스로 이야기하고, 시각으로 청각으로 움직임으로 관객의 발을 붙잡아 두는 강력한 매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3. 요즘 디즈니를 구독해서 영화를 보고 있다. 마블 시리즈부터 차근차근 보고 있는데, 시각예술이 무빙 이미지를 통해  걸음 빠른 속도로 이미지를 보여 주는 방식을 구현할  있게 되었다면,  사이 영화는 어마 무시한 속도로 변해온  같다.

 마블 시리즈를 보면서 마블의 히어로들이 엄마가 되고, 가족을 만들고, 소중한 사람을 잃으며 스스로 진화하는 혹은  과정에서 괴물이 되거나, 돌연변이가 되는 순간을 마주할 때면 영화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개인의 모습, 가족, 사회를 비추면서 우리가 상상할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들까지도 모두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히어로들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세계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자신 혹은 생명이 다해 땅속으로 파묻힌 시체까지도 불러내며 자기가 있는 곳에서 여러 차원의 세계들을 자연스럽게 넘나 든다. 최근 미술계에서도 화두로 떠올랐던 메타버스의 세계가 영화에서는 이미 자연스럽게 현실의  장면처럼 다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는 이미 벌써 오래전에 세계의 형성과, 지구의 발전과 변화,  우주의 생성 멸망까지도 이미지로 재현하고,  환영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단단히도 사로잡았구나 싶었다. 영화 속에서 구현된 이미지들은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역시도 1 1초를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영화가 만들어낸 세계의 환영들은 지루할 틈이 없을 만큼  순간 빠르게 전환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미술은 혹은 전시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야 할까?


4. 아주 오래간만에 다녀온 여행에서,  친한 친구와 감정이 서먹해질 만한 순간이 있었던 , 최근 미술시장이 파이가 커지면서 한국 미술계에도 활력을 기대해 볼만 하다는 친구의  때문이었다.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최근 5-6년을 기준으로 옥션부터 차근차근 유럽과 미국의 갤러리들이 서울에 갤러리를 오픈하긴 했다. 그리고 미술시장에서 중요한 아트페어로 자리 잡고 있는 프리즈가 한국에 오픈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국내 미술시장에도 과열이, 몇몇 아트페어들이 최고의 판매가를 올렸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런데 과연 이게 한국미술시장의 파이가 커진 것일까?  주변의 작가들은  시류에 올라탄 사람들이 거의 없다. 우리가 느끼는 체감은 전과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컬렉터의 세대가 교체되고, 시장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전설처럼 들려온다.

체감으론 아주  나라의  같지만, 서울에 나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갤러리들이 성실하게 전시를 오픈하고, 성실하게 자신들의 작가를 소개한다. 최근 서울에서 열렸던 전시들만 보더라도, 네오 라흐부터  미셸 오토니엘, 안드레아 구르스키, 다니엘 리히터  이전에는 국내에서   없었던 소위 컨템포러리 하다는 작가들의 전시들이 대거 열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세계 유수의 갤러리들이 한국 작가와 교류 없이 조용히 있었던 지난 5-6년의 잠복기를 기억한다. 한국 미술계와의 교류 혹은 한국 작가의 영입(이것은 지나친 기대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없었을뿐더러, 한국에서 열리는 컨템포러리 하다는 전시들의 작가 목록을 보면 어쩐지 구닥다리 같은 느낌이 든다.(2018년도 홍콩 아트 바젤 기간 동안,

네오 라흐의 신작은 당시 완차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긴 한다.) 물론 모두 거장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대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모두 비슷한 전시가 만들어진다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로벌, 세계화라는 단어에서 과거 서구의 식민지화에 대한 냄새가 나는  나만 일까?

런던, 바젤, 뉴욕, 베를린과 같은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지에서 흔하게   있었던 작가들의 전시를 서울에서도   있다는 ,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세계의 미술 시장을 일부 갤러리가 독점하는 양극화 현상, 마치  세계의 경제를 몇몇 국가들이 통제하고 독점하는 것처럼 미술도 자연스럽게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비슷해지고 있다.  안에서 한국 갤러리들은 어떨까? 한국 작가들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커질 것이다혹은 ‘이제 한국은 동시대 아시아 미술의 허브가  것이다 ‘와 같은 뜬구름 잡는 얘기들은 모두 가십처럼 느껴진다. 파이만 커지고, 다양성은 함몰되고 있다. 2018 방문했던 서유럽의 주요 갤러리들이 위치한 지역에서, 경제 침체와 난민 등등의 문제로 문을 닫고 다소 우울했던 당시분위기를 기억한다. 이제  갤러리들은 시장의 신개척지를 아시아로 삼은 것인가? 단순히 장사를 하러 왔다는 제스처 하나에도, 우리는 그들을 무척 반갑게 맞이한다. 마치 세계적 작가들을   있다는  하나만으로 우리가 세계 미술의 반열에 

 올라것처럼. 그럼  세계 미술이라는  대체 무엇일까? 세계화라는 말이 거짓부렁처럼 들리는 순간이다.     

  *아, 세계 시민이 되긴 글렀구나. 여하튼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할 수 있겠다.          


- 한수지

작가의 이전글 차곡차곡_글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