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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착한 레몬 Jul 13. 2022

차곡차곡_글4

*차곡차곡은 양혜리작가와 내가 함께 쓰는 글이다

독일 예술대학에는 룬트강(Rundgang) 또는 연례전시(Jahresausstellung)라 불리는 일종의 행사가 있다. 이는 학생들이 어떤 작업을 하는가 보여주고 학교를 알리는 주요한 학교 행사라 할 수 있다. 작업하고 강의 듣고 회의하던 모든 공간들을 잠시 전시장으로 변신시켜 학교를 개방하고 학생들의 작업을 선보인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잘레강이 흐르는 할레(Halle an der Saale 할레 안 데어 잘레)라는 도시의 디자인 & 예술대학이었다. 당시 함께 살던 플로라(Flora)는 패션디자인 학과였는데, 이 기간에 거대한 쇼를 준비해야 해서 무척 정신없었다. 거대한 파티처럼 이루어지는 이 쇼는 학교 룬트강의 신나는 이벤트이자 파티였다. 


바쁜 와중에 어쩌다 집에서 마주친 플로라가 ‘콘 하우스(Korn Haus) 가봤어? 그곳으로 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거기에 가면 네가 정말 좋아할 것들이 잔뜩 있을 거야! 말했다. 콘 하우스는 예술대학 정문에서 바로 보이던 오래된 3~4층짜리 건물 이름이었다. 걸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는 바닥으로 이루어진 실내에는 거대하고 오래된 종이 작두, 인두, 프레스기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오래된 기계 같은 것들이 있었고, 전시된 작품은 책과 예술이라는 공통의 무언가를 한 작업들이었다. 학과의 이름은 북쿤스트(Buchkunst), 즉 북아트(Book Art) 학과였다. 


다른 전시장과는 달리 모든 작품을 만질 수 있었고, 만져야만 볼 수 있었다. 작은 컴컴한 방에는 하나의 검은 책이 집중 조명을 받고 있었다. 빨강 손전등을 들고 책을 넘기면 빨간 이야기가 펼쳐졌고, 같은 책을 이번에는 초록색 손전등을 들고 읽으면 초록색 이야기가 펼쳐졌다. 북아트가 단순히 ‘팝업북 같은 거’라고 하기에는 범위가 넓었고 예술 작업들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방식 자체가 놀이 같은 책, 직접 조립하며 단어들을 맞추는 책, 종이의 질감, 실크스크린, 다양한 냄새와 퍼포먼스 등등 낡은 이 공간마저 모두 내게는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얼마 감상하지도 못했는데, 전시가 끝나버려 더는 볼 수 없었다. 정말 아쉬웠다. 내년에는 내내 여기 전시만 봐야지 다짐했다. 그나저나 플로라는 내가 이렇게 좋아할 걸 어떻게 알았을까? 


다음 해에는 구경도 구경이었지만, 아예 북쿤스트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나는 지금 사진학 석사과정 중에 있는데, 룬트강에서 보고 너무너무 좋았고, 나도 그 과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교수님은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시며 인터뷰를 하자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동안 내가 했던 사진 작업들을 모아 큰 파일에 잘 챙겨 다시 콘 하우스를 방문했다. 그날은 슐인포탁(Schulinfotag-Schul Informations Tag)이었다. 학교 홍보의 날이자 이제 곧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들이 관심 있는 대학과 학과를 직접 방문하여 살펴보는 날이라 할 수 있다. 


교수님 연구실 큰 책상에 나를 비롯한 여럿의 고등학생과 조교, 재학생들이 둘러앉았다. 북쿤스트 학과에 관심 있는 학생들도 나처럼 그동안 자신이 만들었던 작업들을 들고 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았다. 혼자 종이를 만들어 책으로 엮은 작품을 보여주는 학생, 돼지고기를 비롯한 먹는 것을 좋아해서 관련한 책을 붉고 근사하게 만든 학생,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거창해 보이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학생, 뜨개질 같은 작업물을 가져온 학생, 일러스트나 타이포그라피에 관심이 많은 학생 등등 다양한 학생들이 자신을 보여주고 학교에 관한 정보를 얻어갔다. 


타이포그라피나 일러스트에 더 관심이 있다면 옆 도시의 라이프치히 예술대학의 북쿤스트 학과가 더 잘 맞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곳 학교는 그곳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는 말로 이해했다. 그 사이에서 나도 파일을 열어 사진 작업을 내보였다. 내가 메일 보낸 바로 그 한국 학생이고, 사진 작업을 책으로 엮는 일에도 관심이 많고, 예술 작품 또는 결과물 자체로서의 책, 오리지널 프린트로 만드는 책, 책이라는 물성 혹은 책이라는 물건 자체를 너무 좋아하고 손으로 책을 직접 만드는 기술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교수님은 내가 석사과정 중이니 먼저 석사를 졸업하고 그다음 과정인 마이스터(Meisterschülerstudium) 과정으로 들어와 공부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주셨다. 그때 나는 아마도 살면서 가장 기뻤던 것 같다. 


마이스터 과정은 1년이었고, 짧게만 느껴졌다. 나이도 있는데 계속 학생일 수도 없고, 책상(자리)도 부족해 내가 계속 더 공부하고 싶다고 눌러앉을 수도 없었다. 1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작업, 배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다 배우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혼자 공부할 수 있도록 책을 사고, 선생님들과의 이야기도 잘 기록하고 책 박람회도 열심히 참여했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며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역시 1년은 짧았다. 졸업전시 즈음 코피가 졸졸 흐르는 버릇이 생겼다가 몇 년 뒤 사라지기도 했다. 코피가 날 만큼 했으면 할 만큼 했다는 건가? 겨울이 너무 건조했던가? 내가 코를 너무 세게 후볐던 건 아닐까? 그런데 왜 이다지도 아쉬울까나?


20대 시절, 사진에 푹 빠졌을 때,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고 좋은 수업을 듣고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보고 배웠더랬다. 그중 한 선생님의 말씀은 하나하나 너무 좋아서 늘 감탄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감탄해주는 말들이 모두 선생님이 직접 한 말이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니고 존 버거나 롤랑 바르트, 피에르 브루디외 등등의 이름을 알려주며 그들의 책을 읽으라 했다. <말하기의 다른 방법(존 버거 & 장 모르John Berger & Jean Mohr, 이희재 옮김, 2004, 눈빛출판사)> 은 선생님이 추천한 책 중 가장 줄을 많이 그으며 읽은 책이다. 사진과 글에 관하여 함께 이야기해주어서 좋았고, 모든 사진이 얼마나 모호한가에 관해 말해주는 부분이 기억에 남았다. 모든 사진은 어떤 연속체에서 꺼내 온 것이기 때문에 모호하고 불연속적인 것이고 어딘가에서 떼어 온 파편조각과 같다는 말. 사건이 공적일 때 그 연속체는 역사가 되고 개인적일 때 그 단절된 연속체는 개인사가 된다고 했다. 연속체는 우리의 흘러가는 인생 또는 삶으로 이해하면 될까나. 어떤 사진가는 우리의 인생이 흘러가듯 사진도 흘러간다고 했던가. 


마이스터 과정을 이제 막 시작했던 어느 날, 누군가 갑자기 왜 북아트를 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어쩐지 회의감에 그러게 왜 그럴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꽤나 마음에 담아두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존 버거의 책을 만지작거리며 이번에도 이유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대답 혹은 기쁨을 느낀 것 같다. 어떤 말들은 계속하다 보면 타령이 되거나 가끔 지겨워지기도 하는데, 책이라는 이름의 입체적이고 거대한 공간에서 아무래도 나는 계속 무언가 해보고 만들고 쓰고자 하는 것 같다. 일단은.


- 양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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