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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Nov 11. 2020

소비로운 생활

아메리카노 한잔이면 붕어빵이 한 다스



"붕어빵 얼마예요?"

"세 개 천 원."

"와.. 혹시 만원 짜리도 괜찮을까요?"

"오케이~"


주머니에 현금을 넣어 다녀야 할 계절이 왔다. 갓 구운 통통한 붕어빵이 무려 세 개 천 원이다. 오백 원이던 빼빼로가 천육백 원이 된 판에 붕어빵만은 한결같다.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건넨 만 원짜리를 동그란 케첩 깡통에 툭 던져넣어시곤 천 원짜리를 잔뜩 거슬러 주신다. 흰 봉투에 든 바삭하게 구워진 세 마리를 품에 안고 있으니, 언제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날 꽃다발보다 더 향기롭고 뿌듯하다. 천 원 한 장에 느끼는 벅찬 따듯함. 최소 비용으로 느끼는 최대 행복이다.


붕어빵은 꼬리부터


집에 도착하자 양말만 대충 벗어던지고 붕어빵이 식기 전에 얼른 카누 한 잔을 타서 책상에 앉는다. 진듯한 반죽과 바삭한 꼬리, 따뜻하고 달달한 통팥. 거기에 뜨겁게 탄 카누 한 모금이면 오늘 하루 피로와 상계되기 충분하다. 저비용 고효율을 선호한다. 알뜰살뜰한 편도 아니지만 적은 투입에 훌륭한 아웃풋을 받을 때 느껴지는 만족감이 좋다. 주말에 늘 사 먹는 스타벅스 오늘의 커피 한 잔이 삼천 팔백 원. 그거 한 잔 안 마시면 붕어빵 한 다스를 살 수 있는 걸 알지만 뻔한 계산에도 손해 보는 오늘의 커피를 택한다. 소비도 결국 계산이고 산수인데 각자의 가치가 들어가는 지점부터 단순한 덧셈 뺄셈 영역이 아니다.


소비의 가치


카페에서는 커피에 분위기 값을 얹어서 판다고 한다. 테이크 아웃 손님들에 500원씩 빼주는 프로모션을 하는 지점들은 분위기 값을 500원으로 산정했던 걸까. 잊을만하면 한 번 씩 등장하는 매스컴의 보도에서, 혹은 전국 수만 개 카페 사장의 친구의 친구로부터 구전되는 이야기를 토대로 대부분이 알고 있다. 커피의 원가가 얼마고, 거품이 잔뜩 낀 가격에 마진율이 마블리 주먹으로 눈탱이 맞는 격이라고. 알지만 그러려니 한다. 눈탱이를 감수하고도 기꺼이 지불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커피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 대한민국은 단위 면적당 카페가 가장 많은 나라다. 대화가 필요하고, 쉴 곳이 필요하지만 공원이나 벤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현저히 적다. 그러니 카페로 간다. 상황이 만든 비자발적 소비가 습관적 소비로 변모했다 해도 그것 또한 지갑을 연 사람의 가치가 묻어있는 자발적 소비다.


"나참, 밥 값보다 커피 값이 더 나왔어. "


당장 오늘 오후에 듣게 될 말, 혹은 내 입에서 나올 말. 그러면서도 기꺼이 소비한다. 밥 먹고 커피를 마셔야 하는 게 필수는 아니지만, 내 소비의 가치는 밥보다 비싼 커피를 쿨하게 허락한다.



좌 : 평일의 김밥 , 우 : 휴일의 김밥
평일 비용과 휴일 비용


'평일비'와 '휴일비'를 나눠 생각한다. 기준은 내 마음이다. 통상 평일은 5일이고 휴일은 2일. 하루에 꾸준히 만원씩 썼다고 가정하면 평일엔 5만 원을, 휴일엔 2만 원을 쓴다. 평일에 조금 덜 쓰고, 짧은 휴일에 그만큼을 더 써서 '휴일과 평일의 소비에 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큰 그림' 이라며 휴일 과소비의 합리화로 비벼 본다.


평일에는 주로 편의점 빵을 사 먹는다. 주말에는 카페에서 선뜻 샌드위치도 결제한다.

평일에는 죄책 감 없이 택시를 탄다. 주말에는 같은 거리도 버스를 탄다.

평일에는 카누를 마신다. 주말에는 카누 한 박스 가격의 돈을 1회 먹을 커피값으로 쓴다.

평일에는 배만 채우면 그뿐이다. 주말에는 뭔가 포상이 될만한 걸 나 스스로에게 수여해야 한다.


마치 여섯 살의 계산

나조차 웃음이 나는 게 스타트업 악덕업주가 멋대로 작성한 근로계약서를 본 것 같다. 정성껏 쓴 개소리 냄새가 솔솔 난다. 이쯤 되면 거의 합리화 끝판왕이다. 크게 사는 건 없는데 그렇다고 크게 모이지도 않는 풀 수 있는 아이러니를 외면하기 위해선지, 단지 게을러서 인지 가계부를 쓰지 않는다. 곧 다가오는 신년 프로젝트로 가계부를 써봐야겠다. 서른두 살의 소비가 엄마한테 오백 원 타서 쓰던 초등학생 용돈기입장보다는 낫길 바래보며.


가치의 다름 인정하기


금액의 크기와 상관없이 소비를 허락하게 하는 각자의 기준이 있다. Car poor와 House poor 가 명백한 증거다. 내 주된 소비는 커피, 술, 외식이다. 놀기 좋은 나이다. 인테리어 소품을 사는데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만족감을 느끼는 친구가 있다. 코끼리 한 마리 그려져 있는 그림 한 장이 팔천 원이다. 당장 먹어 없앨 커피와 빵은 만원 주고 사 먹어도 팔천 원짜리 코끼리 그림은 내 소비의 가치가 허락하지 않는다. 사서 선물을 하면 모를까, 내 방에 그 코끼리 종이가 붙을 일은 없다. 반대로 그 친구는 나처럼 할 일 없이 카페에 가지 않는다. 처음엔 ", 저걸  주고 산다고?" 했지만, 이젠 인테리어 소품을 보면 그 친구 생각이 난다. 그 친구 지갑에서 나오는 소비이니 내가 반대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만,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니 시야가 넓어진다. 혹시나 사업을 하게 된다면 이렇게 해야겠다, 이런 제품을 이런 식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어쩌면 쓸 모 없을 생각일지 몰라도 생산적인 사고가 늘어간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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