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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Nov 16. 2020

찌질함에 대하여


스무 살 여름방학 이후부터 스물한 살 겨울까지 치킨이 주 메뉴인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최저시급은 3,770 원이지만 암흑세계에서 형성된 다크 시급 2,800원만 줘도 별 문제 되지 않던 시절이다. 주 4일. 월수금토. 오후 5시부터 새벽 4시 까지. 마감하고 나면 해 뜨는 걸 보며 귀가한다. 서른 다섯 테이블을 혼자 뛰어다니며 열두 시간을 밤새 일해도 하루 일당이 35,000원을 밑돈다. 부모님께서 주시는 용돈이 모자라지도 않았다. 내 욕심이었나. 생각해 보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구실이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장학금 받는 친구들도 있는데, 아무것도 안하면서 장학금도 못 받는 한심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핑계김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학교 외의 소속감이 필요했다 라는 건 번외다. 저런 해결방안도 아닌 것들을 꾸며내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의 찌질함은 시작되었다.


찌질함의 기억.


일주일에 두 번. 오픈 시간에 맞춰 치킨과 소주를 주문하는 중년 남자. 그리고 늘 뭔가 화가 나 있는 젊은 여자. 편견 조금 보탠 눈엔 불륜이라 써 붙이고 다니는 초중년의 남녀였다. 붙어 앉아 원숭이 털 고르듯 하며 치킨집구석에서 분주하게 일을 보고 안녕히 가셨던 그는 언젠가 내게 고맙다며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건넸다. 내 일을 한 것뿐인데, 하루 일당을 넘어서는 팁이라니. 어릴 적부터 모르는 사람이 주는 돈은 받지 말랬고, 대가 없는 금전은 취하는 게 아니랬다. 우물쭈물 하자 점장님이 대신 받아 들고 그들을 보냈다. 잘해서 받는 사례인데 뭘 망설이고 서 있냐고, 어서 주머니에 넣으라고 했다. 쿨하게 거부하지 못한 나 스스로가 찌질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본인 기분 내고자 흥에 겨워 건넨 오만 원이니 아싸 하며 꽁술 마실 생각에 들뜨면 그뿐인데, 뭐가 그렇게 심각했는지 모르겠다. 시답잖은 자격지심이었을까. 어린 학생이 고생하네 하며 삼촌 같은 마음으로 준 것이라 치고 말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이유처럼 나 자신에게 자신이 없으니 괜히 동정일까, 그의 과시 도구로 희생된 것일까 하는 그런 낭비적인 생각을 했다. 찌질했던 거다. 이유야 어쨌든 그는 나에게 소비를 했고, 나는 길가에 떨어진 돈처럼 주머니에 슥 넣으면 그만인데. 어설픈 애늙은이는 이래저래 힘들다.


그 날은 시험에 드는 날이었는가 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절실했던 그 날 새벽 3시 30분. 술에 취한 거구 한 명과 그에게 끌려 온 듯한 두 명의 사내가 함께 자리를 잡았다.


"영업 종료가 네 시라 주문 마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앉았는데 나가라고?"


막무가내로 꼬인 혀를 놀리며 뭐 대단한 곳 온 귀빈처럼 건들댔다. 500cc 맥주잔을 입안에 욱여넣고 싶었다.


"됐고, 사장 나오라 그래."


마감 시제를 정리하던 사장님에게 돌진하던 거구는 내 손에 들린 계산서 뭉탱이를 뺏어 바닥에 내팽겨 치곤 '나 이런 사람이야' 하듯 깔봤다. 그 위협에 겁먹은 내가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대단한 만족감을 느낄 찌질이었다. 찌질함에 레벨이 있다면 이 자가 바로 만랩인가 싶었다.


"영업 끝났다고 내쫓네요?"

"주방이 마감을 해서요. 죄송합니다 손님."

"알바가 교육을 못 받았는지 영 싸가지가 없어요. 이러면 다시는 안 오지."


순간 욱해서 튀어나가려던 몸을 방금 배달 다녀온 매니저가 말렸다. 어린 알바생은 하등하고 깔보면서 사장님에게는 저런 친절한 미소라니. 종업원에 함부로 하는 사람은 강동원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만정이 떨어진다. 매장 밖으로 나간 그는 나의 퇴근을 기다리던 술 취한 선배들의 상욕을 듣고도 태연한 척했다. 한참 어린 그들에게 찍소리 못하고 곧 줄행랑을 쳤다. 본인이 함부로 해도 합리화될 것이라는 안전장치가 있는 알바생인 나에게는 모욕적인 말을 잔뜩 퍼부어도 내 또래 애들에겐 본인이 안전할 수 있는 장치가 없으니 눈도 못 마주친다. 아마 뭘 해도 대성은 못했을 거고 이미 죽었어도 굿 플레이스는 못 갔을 거다. 천국도 거부하는 찌질이니까. 십 년도 더 지난 일을 끊어내지 못하고 뒤끝을 쥐고 있는 나 역시 썩 찌질하지만, 아무리 오랫동안 생각해도 그 새끼는 참 나빴다.


튀어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다.


"야식 먹고 잤는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배가 고픈지 몰라요. 식빵을 두 쪽이나 먹었어요 버터를 양면으로 발라서. 이제 그만 먹어야 되는데 미쳤나 봐."

"선생님은 진짜 살이 안 찌는 체질이신가 봐요. 더 드셔도 되겠어요."

"아우 아니에요~"


말 한마디로 편안한 사회생활이 가능하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뭔지 안다. 하지만 알면서 해주기 싫다. 말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괜히 알랑거리는 것 같아 하기 싫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 그의 자존감 형성에 한 마디 거들걸." 빠른 후회를 한다. 하지 않을 거면 후회도 하지 말던지, 할 거면 제대로 하던지. 스스로 역경을 만든다. 만드는 역경마다 졸작이다. 타인을 칭찬하지 못하는 건 여유가 없어서다. 자존감이 낮아지면 인심이 좁아진다.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고 불만족스러우니, 별 것도 아닌 일에 남 좋을 말을 못 한다. 찌질함이다.


나는 진입장벽이 낮은 사람이다.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걸 즐기면서도 가끔은 내가 에브리바디 만만탱이인가 싶어 눈에 힘을 주고 센 척한다. 자존감 수치가 안전선 아래로 돌 때는 무슨 말을 들어도 내가 만만해서 그런가 하며 날을 세우고 대꾸한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심지어 누구나에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인데 괜히 나한테만 그러는 것 같아 심술이 날 때가 있다. 찌질함이다. 그를 무시하고자 했던 찌질한 행동들이 되려 패배감을 안겨준다. 내가 그보다 못한 것 같아서, 스스로가 별로인 것 같아서. 지금 너와 나의 차이는 딱 수평 정도인 것 같은데, 내 인정과 칭찬으로 인해서 너 혼자 넘쳐흐를까 봐. 다른 노력은 하고 싶지 않은데, 노력해서 앞서 가는 상대방을 보는 마음에 가시가 생긴다. 그 가시는 양날의 가시라서 상대방을 찌르고자 길게 날을 세울수록 되려 내 몸에 깊이 박힌다. 양날의 가시는 늘 튀어나올 기회를 엿보고 있다.


찌질함을 이기는 꾸준함.


아이고 기특하다


찌질함은 참 찌질해서 새로운 환경에 재발하고, 컨디션에 따라 기복도 있다. '트루먼쇼'처럼 같은 상황만 반복될 리 없으니 재발률은 늘 높고 기복은 쉽게 날뛴다. 내 경험상 날뛰는 찌질함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꾸준함이다. 꾸준하게 운동을 한다던지, 꾸준하게 집의 청결상태를 유지한다 던 지, 꾸준하게 뭔가를 학습한다던지. 처음엔 꾸준하게 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지구력이 한결같이 낮다. 때문에 한 편으로 끝을 볼 수 있는 에세이를 쓴다. 한 편 한 편 완결해 내는 맛이 찰지다. 나를 위한 위안이 우연이든 운이든 기대하지 않은 성과까지 선물해주면 며칠은 거뜬하게 찌질함을 눌러놓을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면서 앞서 나가는 사람들에 심술만 남발하면 삐에로도 나를 보곤 안 웃더라.


찌질했던 경험, 혹은 찌질이를 경험했던 기억의 데이터가 차곡차곡 축적되어 알고리즘을 형성한다. 그 알고리즘은 지난날 했던 찌질함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를 준다. "또다시 반복할래? 아님 다른 리액션을 할래? 새로운 액션이 덜 찌질할거란 보장은 없지만, 반복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면 시도해봐." 하고. 성격이 급해서 바로 피드백을 줘야 성에 찼던 지난날의 나는 그 알고리즘을 통해 한 박자 쉬어가는 습관을 연습 중이다. 더불어 꾸준히 무언갈 하기 위해 노력한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비로소 건강한 찌질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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