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 - 소설 <여름의 끝>
들어가기 전에 - 이 글은 백수가 된 필자가 집에 꽂혀있지 않은 책을 읽어보고 싶은데 경제적으로는 녹록지 않고 그렇다고 책을 손에서 놓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차에 서평단에 신청하여 받게 된 책을 읽고 쓰는 일종의 독후감입니다. 기존의 제가 쓴 글과는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독후감이라고는 고등학교 때까지 쓰던 게 전부라 굉장히 걱정되는 글입니다. 스포도 일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를 눌러 훌륭한 작가분들의 글을 감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계절처럼 상처가 흐르다 - 소설 <여름의 끝>
소설은 한 조용한 시골마을의 끝나가는 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장례식으로부터 가지를 뻗어 여러 폭의 수채화를 이어놓은 듯한 마을의 풍경과 그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묘사된다. 여섯 명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로 살아간다. 젊은 시절 뜨거운 사랑과 더불어 이로 인하여 비정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는 코널티 부인, 그런 그녀의 상처를 담담히 지켜주는 동생, 자신은 선택한 적 없는 부모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향을 떠나야 하는 플로리언, 정신질환으로 마을을 떠도는 오펀 렌, 사랑하던 아내와 자식을 한 순간의 실수로 잃은 딜러핸, 그리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벗어나자마자 요동치는 마음으로 갈등하는 앨리가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작가는 한 등장인물의 서사만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여러 등장인물들을 교차하여 서술한다.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기 전까지 초반부는 주로 등장인물들의 배경과 그들이 살아가는 마을, 집, 거리 등에 대해 세세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처음 읽는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들은 100페이지까지 채 다 외우지 못한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우리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시골의 풍경과 일상에 그전까지 읽어왔던 부분을 부여잡은 채로 책을 읽어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분명 어려운 문장은 하나도 없거니와 장면이 명료히 그려질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묘사임에도, 작가의 다른 작품을 접한 적이 없다면 술술 읽어 내려가기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문학보다 비문학을 더 많이 접하는 요즘의 필자의 상황 때문에 그럴 수도 있으니,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길 바란다. 다음 문단의 시작은 '하지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라.
하지만 100페이지가 지나면 분위기가 점점 반전되기 시작한다. 마을의 풍경과 마을 주민들의 일상 묘사에서 벗어나 드디어 서사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 전까지의 문장들로 인하여 빠른 전개에도 어렵지 않게 페이지를 넘기고 있음에 친절함을 느낄 수도 있다. 소설의 서사는 충격을 줄 만큼 새롭지는 않지만 보편적인 이야기가 주는 호기심 때문에 이내는 마지막까지 읽어내고 말리라는 의지를 갖게 한다. 또한 드라마틱한 상황들이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듯 묘사되어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보류한 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는 취미로나마 글을 쓰는 필자에게 작가를 향한 경외심까지 일으키게 하기도 했다.
파스텔톤의 색채를 가진 각각의 장면들은 하나의 키워드로 독자에게 공감을 구한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상처에 덧발라진 연고라 할 수 있는 연민이다. 또한 이러한 연민은 전혀 다른 상처와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연민 어린 시선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을 서술한다. 각자가 가진 상처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들의 심리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하는데 주력한다. 그러한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해하기엔 조금 힘든 행동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강렬함에 집중하기보다는, 쓰라린 뜨거움이 지나가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중심이 되는 서사에는 로맨스가 등장한다. 이 로맨스 또한 연민만큼이나 모든 등장인물을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다. 앨리는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라 하녀로 아내와 아이를 잃은 남자의 집에 들어온다. 몇 년 후 주인의 배려로 주인은 남편이 된다. 사랑하진 않지만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일상은 곧 플로리언이라는 외지인 때문에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난생처음 느끼는 그 생경한 감정에 엘리는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이런 앨리를 보는 코널티 부인은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이 떠올라 외지인이 불편하고 두 사람의 마주침이 신경 쓰인다. 그러나 불현듯 찾아온 사랑을 멈출 수는 없다. 앨리는 같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변해버렸음을 깨닫는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난생처음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을 서술하는 그 문장들이 마음에 닿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 남자가 다시 라스모이에 나타나면 길 반대편으로 갈 것이다. 말을 걸면 가봐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고해성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창피하겠지. 바보 같은 짓이니까, 그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면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려 해봐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남자가 캐시앤드캐리에서 버즈 젤리 상자나 겨자 캔, 삭사 소금 등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그 물건들에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그냥 물건을 넘어선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를 떠나지가 않았다. 엘리는 궁금했다. 그 물건들이 다시 예전과 같아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이제는, 그리고 앞으로도, 코널티 부인 장례식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닐까 궁금했다..... 중략>
그녀의 애달픈 마음은 여름의 무더위처럼 8월이 되면 절정을 달리게 되고, 9월이 되면 뜻밖의 일로 인하여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 또한 다른 인물들과의 연결고리가 이어져 초반의 느껴졌던 난해함 혹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은 사라진 채, 끝에서는 따뜻하고 맑은 뭇국을 한 그릇 비운 것 마냥 개운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책을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면 무지로 인하여 의문이 생긴 윌리엄 트레버의 명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드라마나, 소설을 자주 접하거나 직접 쓰는 사람들은 굳이 누군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갈수록 힘을 갖고 탄력을 받는 이야기를 쓰기가 얼마나 어렵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작가가 얼마나 역량이 있는 작가인지. 한 권 만을 접하고도 나는 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천생 이야기 꾼이었음을. 그 정도로 필자에게 이 소설은 글을 쓰고 있는, 글을 쓰고 싶은 나에게는 많은 자극이 되었던 작품이다.
이 책을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를 검색해보니 불과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가 있었다. 그는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작가였다. 수많은 상을 수상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많은 세계적 작가들의 존경을 받는 스승과도 같은 작가였다. 그러나 충분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80이 넘은 나이까지도 '글을 쓴다' 혹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성공과 명예보다도 더 큰 어떤 의미였을 거라 생각해본다.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따뜻한 이야기 들려주길.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