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 위례

차라리 완전히 앓아버릴 용기

by 수빈노


위례, 차라리 완전히 앓아버릴 용기


때로 고통은 그 어떤 행복보다 삶의 감각을 날카롭게 만든다.

내가 살아있음이, 이 숨이 붙어 있음이 이렇게 선명할 수 있나.

시간이 약이라는데, 그 약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나는 이 집, 이 도시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2018년 엄마가 터전을 옮긴 뒤 아픈 시간이 대부분이 되어버린 이곳. 그 어느 때보다 엄마와의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낸 이 도시에서, 3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이 집에서. 나는 이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 잔인한 시간을 자처했다. 어차피 털어내지 못할 거 완전히 앓아버리겠다고 되도 않는 용기를 냈다. 내 언니는 집에 올 때마다 자꾸만 새로 정리된 집안 구석구석을 보며 어휴 그만 좀 하라고 했다. 나갈 때는 꼭 꼭 당부를 잊지 않았다. 집안일 하지 말고 놀아. 근데 또 그때는 집안일이 가장 재미있었고,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엄마를 지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나는 집안일에 매달렸다. 이제는 선택에 의한 일이자 정말 너무 싫지만서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치우고 비우며 잡념을 견뎠고, 새롭게 정돈하는 행위로 새로운 날을 준비하는 기분을 가다듬었다. 정확히 공을 들이는 만큼 정직한 결과로 공간은 정연해졌다. 그러니 성취감을 느끼기에도 집안일 만한 게 있나? 집안일은 여러모로 위대하다.


그럼에도 집안일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라고 느껴질 때면 마음이 궁색하고 초조해진다. 이렇게 머물면 안 될 것 같거나 좀 더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 옴찔댄다. 이 사소하고 엄청난 노하우를 요하는, 고단하고 티 안나는 노동이야말로 가장 성스러운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이 일이 나의 전부가 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참을 수 없었다. 아, 나는 티가 나는 일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이렇게 티도 안 나게 오랜 날들을 가족의 단정한 삶을 유지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을 엄마의 마음을 생각한다. 좀 더 구석구석 살피고 감사해하지 못했던 무심한 날들을 떠올린다. 고단한 것들은 영 모르고, 평생 그게 세상 일의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도 좋겠다고 했던 엄마 덕분에 나는 정말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엄마의 시절을 갈아 우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곱씹으면 씹을수록 쓰린 진실이었다. 엄마,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했어? 무슨 마음이었어? 힘들지는 않았어?

엄마가 지나간 자리에서 엄마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애증의 부엌. 요리는 즐거운 일이지만 어쩌다 한 번 요리를 하는 것과 일상적으로 요리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특히 매 끼니 요리를 직접 하는 삶은 재고관리(?)라는 절대적인 수고를 필요로 한다. 필요할 때 필요한 양만큼 준비되어 있고, 기한이 지나기 전에 차곡차곡 소진하는 일이란 얼마나 계획적인가… 잘하려면 괜히 골치 아프고 잘해봤자 본전이며, 안되면 명확한 불쾌감을 주는… 참 희한하게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 또 그만큼 곤란한 일은 식사를 규칙적으로 챙긴다는 일인데 특히 나를 위한 끼니를 성의껏 차린다는 것은 뭐랄까… 세상에서 제일 시간과 타협하기 쉬운 일이 된다. 다른 급한 일은 언제나 식사를 앞선다. 몸이 망가지는 것이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챙길 만큼 게을러졌다.


엄마의 단골 아침식사 메뉴를 차려보기로 한다. 오늘은 나를 위해.

낫또와 계란, 두부와 토마토 같은 듣기만 해도 건강해 보이는 것들을 영양 섭취에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차린다. 하… 맛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오열. 우리 엄마 이걸 어떻게 매일 먹었대. 깊은 배려심에 비해 피곤하고 까다롭던 엄마의 식성이 그립다. 엄마의 영양을 챙기는 것은 고됐지만 기쁜 일이었다. 그때는 좋은 것 나쁜 것 따져대느라 정성에 비해 맛이 없었다. 좋게 말해 ‘건강한 맛’. 너무나도 건강하기만 한 맛이었지. 이제는 대충 해도 대충 괜찮은 맛이 난다. 제법 빠른 속도는 덤. 억울하다. 엄마, 엄마는 내 실력을 잘 모르고 있어. 다시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갖고 싶어.

덜 건강하고 더 맛있는 음식을 줬더라면, 엄마는 좀 더 즐겁고 행복했을까?



이전 02화2105 고성 - 2106 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