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보내드리세요’
6월, 하동
우리 모두에게 숨겨둔 여행지가 있다. 언젠가를 상상하며 마음에 품어두는 소중한 장소들. 언니가 종종 이야기하며 꼭 다시 함께 가고 싶다던 경상남도 하동. 가깝지 않은 거리와 이동시간을 따져보면 하루 이틀로는 영 채울 수 없어 쉽게 떠나기 어려웠기에 여행 계획에서 여러 번 반려되던 그곳. 딱 좋은 계절, 드디어 우리는 하동에 가기로 했다. 이제는 마음에 품은 모든 ‘언젠가’들을 ‘지금 당장'으로 재빨리 끌고 오려 틈을 보는 마음. 어김없이 엄마 사진을 옆에 태운 채 달리고 달려 도착한 여름 하동은 너무 너무나 고요하게 아름다웠다.
각자 원하는 차를 앞에 두고 각자 원하는 책과 노트를 쥐고 앉았다 누웠다 느린 시간을 보낸다. 사방이 새소리에 눈앞을 가로지르는 나비들. 쨍한 빛은 따뜻했고 대나무 잎이 바람에 사각대는 소리는 꼭 꿈처럼 평화로웠다. 우연히 고른 책이 마음에 들어 햇살 아래 한참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생생하게 행복한 감각. 그래,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지.
세 부녀가 머물던 며칠 살뜰히 살펴주시던 호스트 아주머니와 작별 인사를 했다.
“꼭 다시 쉬러 오세요. 그리고 어머니는 이제 그만 보내드리세요. 행복하게 지내세요. 그래야 어머니도 편해지세요.”
그 어르신의 말을 여태 종종 생각한다. 나는 이제 엄마에게 조금 덜 말을 걸고 엄마의 밥상을 조금 덜 차린다. 엄마의 물건을 조금씩 정리할 수 있는 날에는 엄마를 보내주는 마음이 된다. 혹시나, 아주 혹시나 내 미련 맞은 마음이 어딘가에 남아있을 엄마를 불편하게 할까 두렵다. 지난 일 년, 내 유일한 위안은 엄마가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엄마는 가볍고 편안하길. 딸이 잘 살아가는 모습을 가끔 들여다봐주길. 여전히 그것만이 내가 바라는 전부이다.
“내가 그때 너무 잘못한 것 같아. 엄마가 그때부터 힘들어진 것 같아. 그날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고비를 한번 더 넘기고, 여전히 잘 지내고 있을까?”
아무리 되풀이해도 지겹지 않은 어떤 행복이 있는 것처럼 곱씹을수록 아픈 슬픔 또한 존재한다. 나처럼 언니도, 우리는 여전히 마음의 짐을 안고 산다. 무사한 날들 사이 방어할 틈 없이 악몽 같은 생각이 일상을 파고든다. “누구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그런 일이 벌어진 거야. 누군가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야.”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짐처럼 뱉는다.
엄마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는 많이 아팠을까?
영원히 궁금해할 질문들이 또다시 꼬리를 물 때, 이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물음표를 거둔다. 다른 생각으로 열심히 점프한다. 여지없이 눈물 나는 그런 시간들을 이제 우리는 조금 덜 생각했으면 좋겠다. 엄마의 슬픔 대신 기쁨을 더 많이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엄마가 아픔을 견디던 시간보다 행복을 누리던 시간들로 엄마의 삶을 예쁘게 기록해주었으면 한다. 우리가 엄마를 지켰듯, 우리의 마음도 온 힘으로 지켜주었으면 한다.
그리워하고 싶은 날엔 그리고, 기억하기 힘들 땐 휙 돌아설 수 있다. 미안함도 가책도 없이, 그렇게 지내고 싶다. 이 마음과 저 마음들을 멋대로 가져다 쓴다. 나를 위해서. 내 마음을 위해서. 그냥 내가 좀 더 편안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내 마음을 지켜주고 싶다. 누구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모든 편의를 나를 위해 쓰고 싶어졌다.
엄마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까다롭고 예민한 공주님이었다. 동시에 엄마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배려가 깊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많이 누렸기 때문에 많이 베풀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많이 베풀어서 그만큼 누릴 수 있었나. 엄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살폈고, 엄마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엄마를 좋아했다. 엄마 주변은 언제나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었다. 따뜻하고 온화하며 그럼에도 곧고 단단한 엄마의 성품을 늘 닮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다르고 싶다. 외모와 기질, 피부 결과 표정, 치아와 손톱까지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아버린 내가 엄마처럼 아플까 봐 두렵다. 나는 엄마와 다르고 싶다. 엄마가 견디던 시간의 얼굴을 나는 모르고 싶다. 엄마의 희생과 배려, 외로움 같은 것들을 까맣게 모르는 삶에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