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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스키 Aug 27. 2022

권태로운 삶을 적시는 술

어나더 라운드, Druk 2020


언제부터 내 삶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


긴장감 없이 지나가는 짧은 대사지만 뼈를 후렸던 한 마디. 찬바람 불던 1월의 주말에 독립영화관 맨뒷자리에 구겨져서 영화를 보고있던 당시의 나는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회사 내에서의 나의 위치와 미래와 심지어 나의 존재가치에 대해 고민하던 최악의 상태였기때문에, 저 한마디가 꼭 내 머릿속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이 우울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빨랑나가)

영화에서는 각기 유래가 불분명한 우울 또는 권태에 빠져있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시놉시스는 이러하다.  


각각 역사, 체육, 음악, 심리학을 가르치는 같은 고등학교 교사 니콜라이, 마르틴, 페테르, 톰뮈는 의욕 없는 학생들을 상대하며 열정마저 사라지고 매일이 우울하기만 하다.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 축하 자리에서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흥미로운 가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르틴이 실험에 들어간다. 인기 없던 수업에 웃음이 넘치고 가족들과의 관계에도 활기가 생긴 마르틴의 후일담에 친구들 모두 동참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정한다.

[언제나 최소 0.05%의 혈중 알코올 농도 유지할 것! 밤 8시 이후엔 술에 손대지 않을 것!

지루한 교사, 매력 없는 남편, 따분한 아빠, 최적의 직업적, 사회적 성과를 위해 점차 알코올 농도를 올리며 실험은 계속되는데… 과연 술은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을지, 도전의 결말은?!
출처 : 다음 영화정보
어나더 라운드 : 트레일러


화의 첫머리는 들판에서 달리기를 하며 맥주를 마시는 활기넘치는 청년들의 한바탕 소동으로 시작해서, 한순간에 점멸하며 중년의 남성, 주인공인 마르틴을 비춘다.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은 모두 고등학교 교사로 매일 똑같은 일과를 수행하며 일종의 '무기력함'을 가진 상태다. 어느 순간, 그들은 삶이 예전같지 않음을 깨닫고 흥미로운 실험을 해보기로 한다. 언제나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만날천날 술 먹고 일해보겠다는 것. (직장인들이라면 한 번쯤 꿈꿔봤을지도)  실험은 굉장히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약간의 알코올로 하이퍼 된 그들이 자신감과 활기를 장착하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뤄내게 된 것. 


그렇다면, 이들은 이렇게 행복해 질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 이 영화는 음주 권장 영화인가?


나의 대답은 '네'이기도 하고, '아니오'기도 하다. (네니오)




*아래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그들의 행복의 여부을 묻는다면, 그들은 결과적으론 불행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질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 영화가 새드엔딩인지, 해피엔딩인지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의 실험은 영화 중반부부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사실 누구나 예상했을 방향으로)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처음엔 알코올이 주는 활력과 자신감에 취해 사회적 성과를 이루어내지만, 점점 알코올에 의존하며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인다. 대낮부터 취해 거나하게 마트에서 깽판치기, 술마시고 바다에 뛰어들기, 학교에 숨겨놓은 술 들키기・・・. 만취는 하룻밤 소동으로 끝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금껏 외면해왔던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분위기는 한순간에 어두워진다. 술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과제들이기에 갈등과 무력감은 더하다. 마르틴은 아내와 별거하게 되었고, 관계를 돌이켜보려고 애쓰지만 거부당한다. 체육교사였던 톰뮈는 알코올 중독증세를 보이다 실직하고야 만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후반부에 일어난다. 시간이 흘러 가르치던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혈중 알코올 유지 실험을 이미 중단했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들은 학생들의 졸업을 축하하던 중 톰뮈의 부고를 듣는다.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교차된다. 톰뮈의 장례식에서 그를 애도했던 학생은 톰뮈 덕분에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소년이었다. 셋은 술이 주던 마법을 잃었지만, 그동안 열정적으로 가르쳤던 학생들의 환호를 받는다. 오랜 친구를 상실했지만, 아내에게서 재결합의 신호가 온다. 상복을 입은 셋 앞을 졸업생들을 태운 퍼레이드 차량이 지나간다. 학생들을 축하하기 위해 셋은 그들과 부둣가로 향한다. 모두가 어우러져 한바탕 춤을 추며 영화는 끝난다. 그들이 춤을 추는 모습은 활기차고, 행복해보인다. 




적절하면 활력의 촉매제가 되지만, 과하면 뒷맛이 좋지 않은, 썩 달콤하지만도 않은 씁쓸함. 정말 술 맛 나는 이야기. 시놉시스는 얼핏 지친 중년들의 얼렁뚱땅 음주소동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초반부는 그런 유쾌함이 존재하지만) 술 한잔으로 해소할 수 없는 슬픔이 있음을 논하며 묵직함을 가진다.


영화의 말미 무분에 인상깊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슴에 남았던 시퀀스가 있다. 등장인물 중 음악교사인 페테르가 대입을 앞두고 심한 불안을 겪는 학생에게 술을 권하는 장면인데 (술 권하는 사회),  '불안의 개념'을 묻는 질문에 학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불안은 '실패'라는 관념에 대한 인간의 대응으로, 

'타인과 삶을 사랑하려면 자신의 실패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학생의 대답은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중 일부인데, 키에르케고르는 불안과 희망의 역설에 대해 말한다. 인간은 양면성을 가진 모순적 존재이기에, 고통이 인간을 파멸시킬수도 있지만 성장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고통을 인정할 때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다. 또한 현재는 미래의 원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면서 산다. 나를 둘러싼 환경, 상황, 처지, 사람들에 의해 혹은 나의 성격, 성향, 의지, 욕구에 의해 선택한 순간들이 나의 현재를 만들어왔다. 아마도 내가 겪고 있는 행복 또는 우울의 유래가 불분명한것은, 내가 택해온 무수한 선택지들은 나도 모르는 새에 골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삶은 매순간 내재적,외재적 요인과 맞물려 새로운 챕터를 맞이한다.

누구나 무수한 질곡 속에 정점을 만끽하고, 실패와 절망 역시  맛본다. 

영화는 실패를 받아들이는 순간 찾아오는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생의 어떠한 지점에서 눅눅한 권태에 빠진 인간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한잔 술이 아니라 ‘과거를 인정하는 순간’이라는 것. 삶의 변곡점은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결코 외재적 요인에 의해서만 찾아오지 않는다. 내재적 요인, 즉 본질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순간의 묘약이 될 뿐이다. 


극중 인물들은 아마 비극적인 사건들을 겪으면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각자의 인생을 휩쓰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과거 속에서 권태의 원인을 찾아낸 것 같았다. 마르틴의 삶 역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매 순간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와중에도 싸우고, 끝이 난 줄 알았는데 다시 시작되는 관계가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여러번의 파고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괴로운 와중에도 행복한 순간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마르틴이 끝내는 행복할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든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고, 알 수 없는 울림에 가슴이 떨렸다. 집까지는 도보로 20분,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걷는 내내 나는 내 과거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이 일을 선택했던 이유, 판단의 근거, 나를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따듯한 카페라테를 한 잔 샀고, 내가 지금 '현재의 나'이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일과, 필요한 일들의 목록을 작성해 나갔다. 내가 우울했던 원인이 보였고, 또 해낼 수 있는 것들이 눈 앞에 있었다. 잔뜩 엉켜있던 현재를 깔끔하게 빗어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지만, 나는 그 전보다는 나은 기분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일기장에 적히는 긍정적인 단어의 수도 조금씩은 늘어났다. 내 성취에 대한 욕망을 들여다 본 끝에, 나는 좀 더 열정적으로 몰두하고 싶은 직업을 가져보기로 했다. 퇴사를 준비했고, (매우 감사하게도 온화한 분위기 속에) 퇴사를 했고, 뜻밖의 사람들에게 따듯한 위로와 조언을 받기도 했고, 여행도 다녔고, 오랜 친구들을 만나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 하며 에너지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갖고싶던 직업을 가지기 위해 새로운 이들과 만나 공부하는 중이다. 


혹시 원인모를 우울과 권태로 슬럼프에 빠져있는 이들이라면, 그리고 영화의 제목처럼 삶의 '어나더 라운드' 가 필요한 이들이라면, 관람을 권하고 싶다. (유튜브, 웨이브에서 단돈 2500원에 살 수 있다!)  내 글솜씨의 한계로 작품의 감동이 온전히 전달되지는 않겠지만, 어나더라운드는 관객에게 감정적 과몰입을 강요하지 않음에도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인물의 심리와 서사를 표현해내는 성숙한 시선이 돋보이는 영화다. 내용만큼이나 음악도 매력적이다. 영업 차원에서 ost를 임베딩한다. (많은 관심? 관람? 감사합니다?) 그날의 후련했던 발걸음을 기꺼이 나눠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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