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랜선 극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빈스키 Oct 11. 2022

당신은 성공을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나요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 2022


휘몰아치는 전개로 6주 동안 심장을 쥐락펴락하던 드라마, <작은아씨들>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매 화 밝혀지는 진실들과 입체적인 인물들 덕분에 에피소드를 곱씹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는 바람에 작은아씨들 이야기를 하라고 멍석을 깔아주면 밤을 지새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밤을 지새워 글을 쓰는 중이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아씨들을 각색한 작품이라는 것과, 드라마 초반부의 클립 영상들을 보았을 때는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의 자매가 갑작스럽게 거액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생활극일까 싶었지만, 12화 동안 이 드라마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드라마는 여러 인물들의 초상을 통해 가난과 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결국은 선과 사랑에 대해 말한다. 성공과 부 앞에서 지켜야 할 '가치'라는 게 과연 있기는 할는지 의심하게 되는 물질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해요 오씨자매...


*아래에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난초가 속삭인다.
힘을 줄게, 어디까지 포기할래?


작은아씨들은 오씨 집안의 세 자매 오인주, 오인경, 오인혜가 원령그룹 가문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이다. 장녀 오인주의 직장동료이자 친구였던 진화영이 인주에게 20억을 남기고 미스테리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계기로, 자매는 각각 원령가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원령가의 원전이자 그들의 힘을 이루는 핵심 '정란회'의 실체와 마주한다.


원령그룹의 자회사인 '오키드 건설', 화영이 인주에게 선물한 구두 '벨벳 오키드' 등 극 중에는 여러 차례 난초의 상징이 등장한다. 자본과 힘의 논리에 의한 의문의 죽음들 옆에 놓인 푸른 난초. 정란회는 푸른 난초를 매개로 욕망을 공유하는 비밀조직이다. 원령가의 비밀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이 희귀한 난초는 나무의 미생물과 곰팡이로부터 영양분을 얻어 살아가는 종이다. 정란회의 회원들은 자신의 난초를 받고, 이를 원령가의 '아버지 나무'에 거는 것으로 입단식을 가진다. 


원령가의 비밀 정원


아버지 나무에 푸른 난초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은 원령가에 메인 정란회의 회원들을 보는 것 같다. 원기선 장군을 아버지 삼아 원령가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이룰 힘을 얻는 대신, 원령가를 떠나면 살아갈 수 없다. 쓸모를 다하고 나면 아버지 나무에서 내쳐지고야 만다. 나무에서 떨어진 난초를 돌려받는 일종의 퇴거 통지를 받으면 죽음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극 중 박재상이 오인혜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다. "지구상에서 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할 수 있겠어?" 


힘을 얻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양자택일. 부와 성공을 위해서 어떤 가치를 배반해야 한다는 이 정란회의 속삭임이 극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세 자매가 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들


#1. 오인주

허영심이 있으면서도 현실적이다. 때로는 푼수 같고 속없는 인주의 모습은 아마 현대사회가 원하는 모습과는 대척점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의 초상은 박재상의 것에 가깝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한 톨의 손해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치밀함. 야심과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하지만 드라마는 인주를 통해 이타성에 대해 말한다. 극 중 오혜석(고모할머니)이 오인주에게 말하는 대사가 있다. 


"넌 어려서부터 잘 웃는 아이었지. 누구에게나 눈을 맞추고 웃어줬는데 난 그 점이 싫었어.

아기는 귀여우니까 같이 웃어주지만, 성인이 돼서 그렇게 웃으면 세상은 네 뺨을 때려."


면접관 앞에서 웃는 오인주를 보면서 원상아가 다음 연극의 주인공으로 인주를 점찍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혜석의 이야기는 예언에 가깝다. 하지만 결국 인주를 구원하는 것 역시 인주의 웃음, 이타성이다. 인주는 자주 손해를 본다. 속알머리없고 희생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원상아의 각본에 따라 접근했던 진화영은 인주를 구하기 위해 귀국했고, 도일과 희재, 혜석, 그리고 인경과 인혜 역시 진심으로 인주를 돕는다. 


박재상과 같은 빈틈없는 야망가를 보며 느낀 것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박재상이 되고 싶어하거나, 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막상 박재상에게 곁을 내어주고 싶진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친구가 되고 싶은 건 박재상이 아니라 오인주다. 때론 인주의 이타성을 이용하는 이들 역시 있겠지만, 마음을 진정 사로잡는 것은 따듯함이라는 것.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한 바람과 햇빛의 내기처럼.



#2. 오인경

오인경은 정의감과 신념이 뚜렷하다. 충분히 부를 축척할 수 있는 수완가의 자질이 있음에도 어째서 부는 한쪽으로 흘러야만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행동하지만 누군가의 비극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물이다. 진실과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당선이 유력한 박재상과 원령가의 비리에 기꺼이 다가간다. 


인경의 꼿꼿함은 때론 너무나 이상주의적이어서 비난을 받는다. 혜석의 지원을 받는 것, 능력을 타고났음에도 힘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을 누군가는 기만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실제로 극의 초반부에는 인경을 곱게 보지 않는 시선이 존재했고, 나 역시 인경이 고집이 완고하게 느껴지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원령가의 깊은 비밀을 파헤처서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그리고 권선징악을 명징해내는 것은 인경이다. 옳다고 믿는 것은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 


인경을 보면 '선한 자가 승리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승리한 자가 옳다는 비정한 논리 대신 옳은 것이 승리한다는 것을 오롯이 증명해내는 인물이다. 오인경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오인경은 뉴스를 보도하며 눈물을 흘린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술을 마셔가며 일을 한다. 눈물을 흘려선 안된다고 하지만, 인경의 힘은 눈물에서 나온다. 제삼자의 비극에 울어줄 수 있는 공명심이 인경이 신념을 지키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3. 오인혜

오인혜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예술가다. 인혜는 효린의 친구로서, 서명을 감춘 대리 화가로서 원령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침투했다. 원상아의 비밀정원을 세 자매 중 가장 먼저 본 인물이기도 하다. 


인혜가 가슴에 박혔던 순간은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동생이기 때문에 받는 사랑'말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받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효린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품한 후 상처받은 눈으로 그림을 그리던 장면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버리고 나면, 다음엔 무엇을 내줘야 할지 모르는 거라는 인주와 인경에게 대못을 박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팔면서도 비참함을 느끼던 눈이다. 


인혜는 능력을 증명해내고자 하는 집념이 있고, 효린의 '귀족적 혈통'을 탐냈기 때문에 원령 일가와 곳곳에 등장하는 모습(feat. 쟤는 또 왜 저기에 있어?)을 볼 때는 끝내는 원령 일가의 수족이 되려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인혜는 원령가로 빨려 들어가는 대신, 효린을 원령가 밖으로 꺼낸다.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얻어내고야 마는 소녀. 하지만 절대 자기 자신을 팔고 싶지는 않은 소녀. 이것이 오인혜었다. 인혜는 결국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에 성공해냈다. 


이러한 인혜의 자존심을 받치는 것은 언니들의 사랑이라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인혜는 언니들의 사랑을 거부한다. 자신의 살을 기꺼이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 자신의 몫을 떼어 인혜에게는 좋은 것만 내어주고 싶은 사랑,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방해하는 사랑. 인혜는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가를 치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원령가에 들어왔다. 


부족할 것 없어 보였던 효린의 집은, 보기에는 예쁘지만 모든 것이 가짜인 '인형의 집'이라는 것을 인혜는 깨닫고 만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인혜가 언니들로부터 '진짜'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혜 덕분에 효린 역시 가짜로부터 탈출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인혜가 원하던 모든 것을 가진 효린을 마주하는 마음속에 시기나 질투, 욕망 등지의 것이 존재했다면 인혜는 스스로와 효린을 구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혜와 효린은 진정한 친구가 됐다. 이것이 인혜가 원령가의 인질이 되지 않게 만들었다. 아버지 나무에 난초를 매달고서도 무사히 탈출한 인물은 인혜가 유일하다. 


#그리고 원상아

원상아는 콘텐츠 역사상 손꼽히는 임팩트 있는 빌런이 아닐까? 상아처럼 우아하며, 맑고 사근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한다. 원상아는 양파 같은 악역이다. 해맑고 어딘가 제멋대로인 사모님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좋은 모습을 연기하는 매 맞는 아내였고,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판을 꾸미고 조종하는 정란회의 핵심이자, 암컷 사마귀 같은 희대의 살인마였다! 드라마의 대사가 묘하게 연극 톤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원상아가 연출하는 극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원상아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 자매와 대척점에 서 있다. 원상아는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도 딸도,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시점에서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세 자매가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과 이타심을 가졌기 때문에 선이라면, 원상아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으며, 극도의 자기중심성을 가진 절대악이다. 원상아는 한 톨의 양보도 없다. 절대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원상아에게서 흥미로웠던 점은, 원기선의 직계 자식이자 정란회의 주인인데도 '원기선 장군의 딸' 혹은 '박재상 이사장 사모님'으로 불리고, 심지어 스스로조차 자신을 '나 우리 아빠 딸이에요'라고 소개한다는 것이었다. 원장군으로부터 난초를 물려받고, 아버지 나무가 되고자 하지만 원상아는 나무가 될 수 없다. 원상아는 난초를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했다. 


이름인 '상아'에는 한자어로 두 가지 뜻이 더 있다. 하나는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여자, 그리고 또 하나는 언제나 어린아이. 원상아의 시간은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다. 원상아는 어머니가 죽은 그 방, '닫힌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언젠가 열었어야 할 문을 열어보지 않은 탓에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건 부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파괴적인 인물로 자라 버렸고, 끝내 난초와 본인 스스로를 파괴하고야 만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것들

이 드라마는 결국 선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부와 성공과 맞바꾸지 않아야 하는, 맞바꿀 수 없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 이타심, 용서, 정의, 신념, 꿈, 자존심, 공감, 감수성・・・. 세 자매가 끝까지 지켜냈던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원령가는 왜 '원령'일까? 원령가의 이름은 혹시 怨靈 이 아닐까? 원기선을 주축으로 한 초대 정란회는 베트남에서 이미 유령이 되어 돌아왔다. 베트남의 유령이라는 난초의 이름처럼, 정란회의 인물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유령처럼 살아간다. 힘만을 쫓으며,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하면서.




1부와 12부에서 수미상관을 이룬다고 느껴졌던 부분들이 있다. 진화영과 오인경의 대사다. 1부에서 진화영은 말한다. "미래에는 경리가 없어질거야, 그럼 어떤 경리가 남을까? 회사가 어떤 잠재력과 위협을 가졌는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경리".

그리고 오인경이 말한다. "자신이 이 전쟁을 취재했다면 어떤 기사를 썼을까? 전황을 묘사하고, 전선을 그리고, 전사자의 숫자를 썼겠지만, 어떤 이들이 죽었는지, 어떤 꿈을 품고 어떤 좌절을 겪었는지도 읽을 수 있었을까?"


화영과 인경은 '이야기'를 읽어내고자 한다. 숫자가 설명해 주지 않는, 정량이 아닌 정성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 이야기 속에는 있다. 드라마가 극 전체를 통해 '돈으로 맞바꿀 수 없는 인간의 가치' 를 논한다면, 이야기를 읽는 행위는 그 가치를 찾는 해답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이야기 속에는 사람이 있다. 차갑고 고단한 물질세계에서도 역동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원령가라는 철옹성과 700억 원을 둘러싼 긴 복수극이 막을 내린 후 인주, 인경, 인혜가 각자 흩어져 살게 되는 것이 좋았다. 인주는 결국 영혼이 살 집을 가질 수 되었다. 웬만한 일은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든든한 집. 인경과 인혜 역시 각자의 영혼이 살 집을 찾아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나 역시 물질 사회의 인간으로서 성공과 부를 위해서는 영혼을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모두가 조금쯤은 동의하기에, 자꾸만 속없이 사랑을 베풀고, 선을 굽히지 않는 자매들을 미련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자매들을 사랑하고 응원하게 되버리고야 마는 것은, 마음 어딘가는 이들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12부작의 이야기 덕분에 조금은 더 따듯한 가슴으로 자매들의 미래를 상상하고 격려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영혼 역시 맞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여정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





글을 잔뜩 쓰면서도 채 풀어나가지 못한 각종 떡밥거리들이 많이 남아있어 한동안 작씨앓이를 할 것 같다. 그래서 작은아씨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분들이 글을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토크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권태로운 삶을 적시는 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