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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blimer Nov 27. 2022

01 H와의 첫 만남

Prologue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그 서 있는 자리에 영원히 결박당하게 되어 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자리가 잘못된 자리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순간은 영원히 기억 속에서 반복된다. 반복을 통해 기억은 영원을 획득한다. 



     

내가 한을 만난 것은 어느 인터넷 동호회 모임에서였다. 낯선 사람들이 좋은 이유는 낯선 기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특별한 주제를 가진 모임은 아니었다. 그저 시시콜콜한 사교적인 모임에 불과했다. 여기서 우연히 한을 만났다. 


처음에는 회원들 간에 온라인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쪽지로부터 시작했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목소리를 들은 후에는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다. 한은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에 나를 초대했다. 모든 사람들이 낯설었지만, 한이 그곳에 있었다.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계절이 한 번 지났을 때 한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눈이 올 것만 같은 날이었다. 


“나는 이런 날씨가 좋아. 눈이 막상 내리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질 수가 없잖아요. 그렇지만 날씨가 너무 맑아도 기대감을 가질 수 없으니까 적당한 기대가 가능한 적당하게 흐린 날이 좋아.”


내리는 눈은 별로라고 한은 말했다. 그저 눈이 내릴 것을 기대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우리는 홍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삼겹살집을 찾았다. 흐릿한 날씨에 창가에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의 낯선 두런거림과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내는 소리는 잘 어울린다. 기분 좋은 두런거림을 즐기고 있을 때, 한이 나에게 말했다. 


“혹시 눈이 내릴 것 같은 흐릿한 날씨에 홍대 입구에 있는 삼겹살집에 앉아서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때마침 길을 지나가고 있는 예전 애인을 보게 될 확률이 얼마쯤 될까?”


“응? 무슨 소리야?”


“오늘 하필 우연하게도 기적이 일어났네.”


“헤어진 애인이 지나갔어?”


한은 술을 마시지 못했다. 술을 마시는 자리에 항상 함께 하면서도 한은 언제나 사이다를 마셨다. 사이다를 마시면서도 취한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취한 사람보다 더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나는 비어있는 소주잔을 하나 들어서 물을 채워 건네주었다. 



“자. 이런 날은 특별하니까 한 잔 마셔. 술을 마시는데 꼭 알코올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딱 한 잔만 마셔봐요.”


그 한 잔을 마신 한은, 정말 취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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