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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blimer Nov 29. 2022

01 프리랜서 작가의 미친 하루

2022.11.28.


| 대견하지만 터무니없는 생각


모처럼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써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웬만해서는 잘 들지 않는 생각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나 스스로가 참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브런치에 글을 꾸준하게 써보겠다고 결심한 지 채 하루가 지나가기도 전에, 나는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나에게 골탕 먹이는 것을 취미로 하는 '신'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칭찬은 아니었던 거지


글을 쓰는 것이 좋았고, 책을 읽는 일에는 익숙했다. 빠른 속도 책을 다독하는 탓에 항상 책을 살 돈이 부족했다. 오래된 책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을 해서 읽을 수 있었지만, 신간은 어쩔 수 없이 구매해야 했기 때문에 돈이 부족했던 나는 항상 주말이나 방학 때, 종로에 있는 영풍문고를 찾아 하루 종일 서서 책을 읽곤 했다. 주로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책을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 대한 충분한 예의는 아니었던 셈이다. 서서 읽어야 했기 때문에 다리가 아파서 책을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만 갔다. 바닥에 앉아서 읽을 용기가 없는 소심한 ENTJ였던 탓일까? 그렇게 서너 시간 서서 책 2-3권을 읽은 후에야 집으로 향하곤 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 지도교수님께서는 나에게 "글을 지어내는 공장"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읽는 속도도 빠를 뿐 아니라 쓰는 일에도 겁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주제라도 서슴지 않고 달려들었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글을 써내곤 했다. 그때는 그게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깃털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프리랜서 작가의 삶을 살아보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 플랫폼 사이트에 서비스를 올리면서도 "누가 이걸 구매하겠어"라는 마음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니 간간히 해볼까" 하는 아주 깃털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었다. 두 달 동안 단 한건의 의뢰도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러려니 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프리랜서 작가는 무조건 다 쓴다


최근 누군가가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면, 부업이지만 꽤나 마음에 드는 직업인 '프리랜서 작가'라고 답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어떤 것을 쓰시는데요?"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저는 무조건 다 씁니다."

"무조건 무엇을 쓰시는데요? 소설? 시? 어떤 글을 쓰시는 거죠?"

"저는 다 씁니다. 왜냐하면 프리랜서니까요."


그럴 때마다 상대방의 얼굴은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차 있지만, 나는 그 모호함이 좋다. 




어제오늘 밀려들어온 원고가 8개를 넘어가고 있다. 원고 마감일은 모두 2-3일에서 길면 5일이다. 마감일이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글 쓰는 것이 즐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프리랜서 작가로 산다는 건 일단 무조건 쓰고 본다는 의미이다. 이쯤에서 내 컴퓨터와 아이패드에 떠 있는 오늘 마감한 원고들을 한번 살펴보자. 



기후 환경 변화에 대한 원고 A4 4장 분량 원고(오늘 마감)

페르낭 브로델의 책 『00 000』서평 원고 A4 5장(오늘 마감)

스마트 스토어 상세 페이지 <00 가게> 원고 A4 5장(오늘 마감)

싱어송라이터 가수 A 씨 앨범 소개 원고 A4 1장 1,200자(오늘 마감)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책 『00 000』서평 원고 A4 2장(오늘 마감 예정)

25페이지 학술논문 요약 A4 6장 분량 원고 (오늘 마감 예정)





  


"미치고 구짝 뛰겠네"


기후환경 원고를 쓰기 위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및 각종 신문기사들을 뒤적거렸고, 페르낭 브로델의 책을 찾아 하남 일가 도서관에 다녀왔으며, 스마트 스토어 상세 페이지 제작을 위해 유사한 스토어 페이지를 대여섯 군데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책을 들고 내 생각과 신념과 다르지만 한번 믿어보자고 되뇌었고, 이틀 째 싱어송라이터 가수 A 씨의 노래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음악을 들으며 1,000자 원고에 혼을 불어넣기 위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다. 피워본 적이 없는 담배가 피우고 싶을 정도로 미치고 팔짝 구짝 뛸 지경이다.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더럽게 좋더라니...


어제 하도 피곤해서 단 하루를 쉬었을 뿐이다. 원고 2개 정도는 내일 하루면 쓸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 불안한 띵동 소리로부터 잠을 깨더니 갑자기 원고가 밀려들어왔다. 커피를 마시면서 고상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쓰는 월요일을 상상했건만...  중간중간 들어오는 원고 피드백과 교정과 수정 작업, 중간중간 들어오는 문의에 대한 친절하고 아주 긴 상담. 


스마트 스토어 원고를 쓰다가 환경문제를 고심해야 하고, 수정 요청이 들어오면 내 생각과는 다른 종교적인 신념을 가져보고자 빙의해야 하는 나는. 프.리.랜.서. 작가이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자 브런치에, 두 글자를 써본다. 


시발,

아직도 원고 2개나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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