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세계명작(원작 : 성냥팔이 소녀)
마음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가 소녀를 에워쌌다.
소녀는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타오르면서 반짝 어둠을 밝힌다. 곧 금세 꺼지고 말테지만.
소녀는 후후 조금 웃음이 났다. 그러고 담배를 입에 물고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불꽃이 다 타오르며 알싸한 냄새가 가슴을 가득채우다 그마저도 텅 비워버렸다. 소녀는 무어라도 마음을 채우려는 듯 연거푸 연기를 몇번이고 더 들이마시고 들이마셨지만 그 모든 것은 타들어갈 뿐 아무것도 채울 수는 없다. 그것은 소녀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처음 담배를 배운 것은 그 순간에 반짝이는 불꽃을 터뜨리는 라이터를 좋아하면서 부터다.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조그만 숨구멍으로 마치 기다렸다는 듯 탁하고 터져오르는 불꽃. 아주 오래전 할머니에게 골동품 가게에서 졸라서 산 이 오래된 기름 라이터가 소녀는 무척이나 좋았다. 그러다 좋아하던 오빠가 피우던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우연히 피우게 된 담배가 이제는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소녀가 담배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술 취한 아버지 호주머니 속에서 몇 개 슬쩍하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소녀는 라이터를 다시 켰다. 최근에 SNS에서 알게된 남자가 오늘 맛있는 저녁을 사줄 테니 만나자고 해서 조금 떨리는 마음이었다. 그 전에 사진으로 얼굴을 보기는 했는데 좀 나이들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네모난 창 안에서도 느껴지는 다정한 말투가 소녀를 챙겨주는 것 같아 좋았다.
곧 한 남자가 앞에 서더니 크크님 맞죠? 안녕하세요 저 하이에요. 일단 여기는 추우니까 이동하죠라고 말하며 손을 잡아 끄었다. 사진과 전혀 다른 웬 아저씨였는데 사진과 다른것도 황당했지만 반대편을 보니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힐끔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좀 쎄한 느낌이 들어 아 잠깐만요 하고 손을 뿌리치자 한 순간 남자의 안색이 바뀌었다. 아 왜.
아 저기는 일행이세요?
남자는 피식 웃더니 아 아니에요 라며 다시 손을 끌었다.
아 됐어요 그냥 갈게요 라고 소녀가 뒤돌아서자 그 남자가 아 씨발!! 이러면서 소녀의 어깨를 거칠게 돌리며 질질 끌고 갔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소녀는 번뜩 주머니속에 라이터가 떠올라 순간 길모퉁이에 모여 있는 바싹 마른 낙엽 더미 위로 기름 라이터를 던졌다. 갑자기 불꽃이 크게 일며 순식간에 온 몸이 확 뜨거워졌다.
남자는 갑자스러운 불꽃에 놀라 엉겁결에 손을 놓았고 소녀는 그 틈을 타 미친듯이 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땐 어두운 사방에 아무도 없었다. 소녀는 가쁜 숨을 몰아내쉬며 안도의 한숨을 쉬다 울음이 터졌다. 엉엉 울며 주머니를 뒤졌는데 부적처럼 가지고 있던 할머니가 사준 라이터는 이미 던져버렸고 주머니에는 천원 한 장이랑 담배 한개비가 들어 있었다.
소녀는 하루종일 별로 먹은 것도 없는 터라 너무 허기가 졌고 컵라면을 사먹으러 편의점에 들어갔다. 날씨가 추워 손이며 발이며 꽁꽁 얼은데다 울면서 한참을 뛰었던 터라 얼굴이 터질 것 같이 아팠다. 조야한 스티로폼 용기 위로 뜨거운 물을 붓고 노곤노곤하게 꼬불꼬불한 라면들이 녹아내리고 있는데 그 탁한 국물속에서 용케도 비친 내 얼굴이 참으로 못났다. 소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숯불고기집에서 뜨거운 기름기가 낀 김이 연신 굴뚝으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달콤한 돼지양념 냄새가 코를 찌르며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아빠랑 엄마랑 커다란 유리창 안에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소녀는 멍하니 그들을 보며, 사람들은 참 행복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후루룩 마지막 남은 라면 젓갈을 후후 불며 다 먹고 남은 돈으로 촌스러운 플라스틱 라이터를 사고 편의점을 나왔다.
크리스마스 트리색을 닮은 초록색 플라스틱 라이터였는데 기름 라이터보다 여간 잘 말을 듣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머니 속에서 손을 넣으면 뭐라도 잡히니 좀 마음이 놓였다.
식후땡. 그녀는 으슥한 골목에 들어가 담배 한가치와 새로 산 라이터를 켰다.
다시 숨구멍으로 불꽃이 확 일었다. 불꽃은 조야한 것이었든 값이 나가는 것이었든 그 무엇에서도 본질을 잃지 않고 똑같이 아름다웠다. 마음이 따뜻해지며 몇번이고 몇번이고 라이터를 켜보았다.
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발인을 한 날, 그 날 아침 아버지는 유일하게 취하지 않은 날이었다. 타오르던 불꽃. 그 속에서 재가 되어가는 생명의 마지막 잔해. 소녀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할머니, 저도 데려가세요. 이 불꽃이 꺼지면 할머니가 사라지리란 걸 알아요 ! 할머니 나도 데려가요 소녀는 엉엉 울며 말했다.
타닥타닥. 불은 곧 사라그든다.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생명이 짧다.
소녀는 한 밤중을 집에도 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하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불빛에 이끌려 라이브 바 안으로 들어갔다. 늦은 밤이었는데도 그 곳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아주 시끄러웠다. 그 때갑자기 라이트 조명이 타닥 하고 켜졌고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라이브밴드가 짧은 인사를 하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소녀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밴드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라이트 조명의 세례가 비트에 따라서 요동치는 소녀의 가슴만큼이나 그리고 라이터 불빛 만큼이나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소녀는 사람들과 함께 으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밴드의 연주에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그녀는 꺼지지 않는 불빛 아래에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과 함께 손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정신없이 뛰고 구르는 사이에 주머니 속에 있던 초록색 플라스틱 라이터가 외투 주머니에서 흘러 떨어졌다. 소녀는 떨어진 라이터를 보았지만 줍지 않고 다시 춤을 춘다.
소녀는 더 이상 라이터를 켜지 않았고 본인이 찾은 불꽃 안에서 살아야겠 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숨구멍으로 겨우 새어 나온 그 불꽃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고 그 불꽃안에서 자신을 태우며 저 밴드처럼 더 큰 꽃으로 자신도 그렇게 되겠다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