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ㅇㅇ Aug 17. 2021

정의(正義)의 생김새

 결정(結晶)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어떤 진실한 존재가 껍질 안에 쌓여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찾아온 것, 누군가 계속해서 그 존재 여부에 대해 의문을 품어온 것, 나는 진실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그 믿음에도 행위 하는 자가 없어 단지 그 생김새를 짐작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것이다. 혹자는 분명 그것은 그 껍질이 다일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결정을 믿는다.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결정은 시대의 조류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밀려 떠다니면서 쉽게 마음을 주는 그러한 종류의 것은 분명 아니다. 

이에 어떤 이는 웬만한 조류에는 흔들리지 않는 나름의 깊은 뿌리가 있다면 그렇게 떠다니는 성질이야 말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어떤 이는 그러한 떠다닌다는 본질 자체가 어떠한 기준도 제시해줄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은 조류의 쓰레기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것이 내가 찾는 것이 아니다. 

결정은 누가 보기엔 섬이고 누가 보기엔 쓰레기인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결정은 다르다. 그 무게의 정도가 가볍다 할지라도 진실로 가치 있는 그것의 진중함이 시끄럽고 분분한 입들을 한 번에 다물어 버리게 하며, 아무리 파도가 그것을 흔들고 바람이 매섭게 때려 내리치며 그것을 극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지라도 차라리 부서짐을 택하지 흔들리지는 않을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너무도 보고 싶지만, 

껍질은 유연하고 말랑하여 나는 그 ‘결정’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단단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수기 쉬웠을 텐데, 수많은 이들이 그 주위를 맴돌아 흙먼지로 희부옇게 되고 두터워져 나 역시 그 주위를 맴돈다. 희부옇게 비치는 결정을 보며 난 정의를 정의한다. 그 결정은 흐릿하고 흔들려 보인다. 모두들 껍질을 벗겨내려고 핥아보고 긁어 내보고 두드려 보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갈라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 결정을 보지 못하는 동안 일종의 쾌감을 맛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결정을 모르는 것은 틀림에 없으나 동시에 분명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를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모름으로 내가 믿고 있는 바가 결정일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에게 그 결정의 모양이나 크기, 생김새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내가 그렇게 믿고 만들어 버린 그 결정이 나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나는 그 어떤 부정에도 합리화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논의하는 것은 나의 품격과 학식을 드높이는 것이며, 고작 하루의 끼니나 고민하며 밥이나 빌어먹는 자들에 비하면 내가 그 결정을 고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의 자랑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논의를 멈추지는 않으며 그로 인한 쾌감을 느낄 뿐 굳이 그 결정을 찾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역시 나의 귓전에 울리는, 그를 행하고 싶지 않은 나약하고 달콤한 속삭임. 

혹시 누군가의 말처럼 진짜로 아무것도 없다면. 그리고 그 멀겋고 진득한 껍질마저 없어지게 된다면. 그 모든 책임은 나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우리가 믿고 지켜볼 각자의 정의까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한 번도 무엇을 갈라보지 않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끝으로 그 두껍고 진득한 가죽에 상처를 내었을 때, 그것은 처음 마주하지만 달큰한 냄새가 나는 음식을 맛볼 때의, 그러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주한 세상을 음미하며 서서히 새어 나오는 그런 아름답고 서정적인 향연은 아니다. 그것은 찢겨내자 마자 내 얼굴과 온몸을 적시고 더럽혀 온 세상을 그로 집어삼키기 전에는 절대 멈출 것 같지 않는, 핏빛 기둥으로 폭발하고 싶어 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그 누가 이 비린내 나고 숭고한 피가 그 가죽 밑에서 얌전히 유영하고 있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 누가 이 반항적이면서도 엄청난 힘을 가진 이것이 그 가죽 밑에서 그를 금방이라도 죽이지 않고 살려둘 수 있었다고 믿을 수 있을까.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니가 그 가죽을 얼른 찢어 내주길. 죽을 만큼 갑갑하고 이 두껍고 역겨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 희부옇고 애매한 이 가죽을 니가 얼른 찢어 내주길. 나의 이 꿈틀거리는 붉고 선명한 아름다움을 얼른 니가 알아봐 주길.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그 예리한 칼끝에 난도질 당하든 상관없으니 반드시 찢어 내만 주길. 

나는 그것을 처음 갈라내었을 때, 그것의 억눌린 시간과 마음이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라 가만히 그 칼집의 틈을 비집고 들여다보며 언제쯤 얘가 고개를 내밀고 귀여운 미소로 나를 비웃어 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갈랐을 때 그 기다림의 시간에 복수를 하듯 내 얼굴에 퉤 하고 그 피를 뱉어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그 압력과 직격으로 날아오는 피 기둥에 맞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피와 내 피가 뒤섞여 나는 볼 수도, 그 정체를 알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남은 단 하나의 진리. 

처음 봤을 때, 나는 솔직히 그것을 의심했다. 그것은 그 동안의 추측과 논의가 무색하게도 너무나 단순하여 명료하여 그 아무리 천한 자라도 자신의 가슴속에 하나쯤 품었을 만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이다. 그것이 결정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너무나 명백하고 단순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많은 일들에 적용하기에는 때가 타고 덩어리가 커지는 그것이 정의(正義)의 결정이다. 결국 정의는 절대적으로 존재하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의의 결정은 단단하고 강하지만 단지 하나의 진리만을 담고 있기에 그리고 너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너와 나는 같은 것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찾은 결정은 그러한 과정에서 다시 사람들의 각자 다르게 생긴 입에서 튀어나온 침과 그들이 맴돌면서 흩날린 흙먼지에 뒤덮여 다시 말랑하고 희부연한 껍질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좋다. 그것이 잊혀질 때쯤, 누군가 또다시 그것을 반드시 갈라내어 그 결정을 기억하게 할 수 있다면. 




작가의 이전글 라이터를 켜는 소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