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목적지

in Seattle

by cudy



첫번째 기억

시애틀, Seattle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꼬박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책은 공항에서 구입했다. 나를 닮은 시집 두 권이었다.


000136460020.jpg Seattle, 2018



별다른 준비 없이 여행을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 해 갈 것이 딱히 없었다. 여권과 한 개의 신용카드, 공항 환전소에서 급하게 바꾼 돈, 몇 가지의 스웨터와 원피스, 그리고 스니커즈 운동화 한 켤레 정도가 짐의 전부였다. 늘 그렇듯 초코바 두 개를 사들고 대기 의자에 앉아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이어폰을 꼈다. 이륙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고 나는 5분마다 한 번씩 시계를 봤다. 익숙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살짝 태블릿 PC를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떠나고, 돌아온다. 나 또한 나만의 사정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가 그간 해내지 못한 것들. 이유 없이 비난받았던 것들. 두려움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 애처로운 악을 가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에 있는 선한 것들은 이유도 모른 채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러한 것들은 이미 내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아직까지 내게 선한 온기가 남아 있는 척, 내 몸 여기저기 애달프게 달려 있는 것들을 가지고 갔을 뿐이다.


저장해 온 곡이 몇 가지 되지 않아 생각보다 빠르게 마지막 노래에 다다랐다. 창문 너머로 한 대의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공항 내 서점으로 다시 발을 돌렸다.


000375400010.jpg Seattle, 2018



비행기 안에서의 무료한 10시간을 때우기에 적합한 책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한 두어 바퀴 서점을 돌다 사람들은 어떤 책을 고르나 한참을 보기도 했고 베스트셀러 코너 앞을 서성이기도 했다. 책을 들어다 놨다를 몇 번, 아무 책이나 집어 페이지를 넘겨 읽기를 몇 번. 결국은 원하는 책을 고르지 못했다. 꼼짝없이 10시간 동안 밖만 보다 가겠구나 생각하며 서점을 나서는 순간, 문 바로 옆에 걸쳐져 있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아무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애처로운 한 권의 시집이었다. 꼭 나의 처지와 같았다.


시집 두 권을 들고 나오는 길은 생각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가벼운 악을 공항에 있는 작은 서점에 덜어내고 온 기분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시애틀로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출발할 거야. 도착하면 전화할게. 괜찮아. 정말이야. 같은 말을 남기고 부푼 마음으로 시집 첫 장을 열었다.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첫 문장부터 가슴이 쿵했다.

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나의 손가락과 책이 뜨겁게 밀착했다.

창문 너머 해가 뉘엿뉘엿 빠르게도 진다.






˙첫 문장의 시집

/류근, 상처적 체질


# 범람하는 기억을 기록합니다.

@cu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