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조카에게 고모가 쓰는 편지 by 믹서
사랑하는 윤에게
안녕! 너의 하나밖에 없는 고모야. 요즘 고모는 네 생각을 하느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윤의 하루는 어떨까. 밖에서 뛰어 놀기 좋아하는 윤이가 코로나 때문에 지치진 않았을까 걱정도 하다가, 핸드폰에 가득한 익살스러운 윤이 사진을 보며 킥킥대기도 해. 고모도 윤이처럼 천진난만한 어린이였을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내 어린 시절 모습과 비교도 하면서 문득 아련해지더라. 그리고 눈을 감고 상상해. 지금 나의 일상에도 윤이 같은 아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얼마 전에 윤이 고모에게 했던 부탁, 기억하니?
고모, 동생 낳아주면 안 돼요? 고종사촌 동생!
소원을 들어달라며 고모를 보자마자 달려드는 네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어. 지금 남동생이 있지만, 여동생도 생기면 좋겠다고 고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지. 윤의 그 부탁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아. 그래서 고모가 정말 사랑하는 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지금 8살인 네가 자라 언젠가 이 편지를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려.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는 처음이라 살짝 긴장도 되고.
가장 먼저, 윤의 마음이 어떨지 헤아려보았어. 우리 윤이 남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모는 잘 알고 있어. 동생이 한 명 더 생긴다면, 윤이 좋아하는 과자 ‘콘치’도 기꺼이 나눠줄 정도로 예뻐해 주리라 생각해. 아니, 그보다 더 사랑해 줄 거라 믿어. 하지만 고모는 우리 윤의 부탁을 들어주기 못할 것 같아.
윤의 동생을 낳을지, 고모도 고모부와 오랫동안 고민했어. 윤에게 예쁜 동생을 안겨주고 싶었던 때도 있었고, 실제로 그럴 뻔도 했지. 윤이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고모에게도 천사가 찾아왔었거든. 그런데 3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갔단다.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윤과 같은 나이였을 거야. 그때 일을 생각하면 고모와 고모부는 아직 눈물이 나.
고모도 한때는 윤처럼 사랑스러운 딸을 가진 엄마가 되고 싶었어.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의심한 적이 없었지. 결혼했으니 당연히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였나 봐. 게다가 ‘아이를 낳아야 부모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많이들 하더라고. 고모도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를 바랐어.
예쁜 윤아!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 시간이 흘러가면서 생각은 계속 변화하지. 맞아. 고모의 생각이 바뀌었어. 이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긴 해.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갑자기 생각이 변해서 ‘비출산’을 선언한 게 아니었거든. 앗! 윤에게 비출산이라는 단어가 너무 생소하고 어려울 수 있겠다. 비출산이란, ‘아이를 낳지 않음’을 의미해.
돌이켜 보면 비출산이라는 선택까지 오는 길은 꽤나 길고 험난했어. 윤의 고종 사촌이 될 뻔했던 아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고모는 매우 힘들었지. 하지만, 금방 다른 천사가 찾아올 거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 하지만 현실은 내 마음과 달리 복잡했지. 회사에서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거든. 천사를 바랐지만, 미친 듯이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천사를 까먹고 있었던 거야.
시간의 힘이란 정말 무섭더라. 천사를 잃었던 슬픔을 계속 안고 살아갈 줄 알았는데, 그 슬픔을 야금야금 훔쳐가 버렸어. 그 자리를 일·성과·커리어가 대신 차지했지. 근데 고모는 그게 싫지 않았나 봐. 8년이 지난 지금도 천사는 뒷전이고, 일만 열심히 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렇다고 천사 잃은 슬픔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았어. 마음 깊이 넣어두고, 꺼내지를 못했어. 누군가 고모가 겪은 유산에 대해 가벼이 말할 때 상처도 받았거든. 다시 아이가 생겨도 또 하늘나라로 가버리지 않을까 두려움도 있었고. 그래서 고모와 고모부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 아이를 낳는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대화했단다.
“과연 아이를 낳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아이 없이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주로 이런 고민이었지. 그래서 현재 비출산 상태인 고모에게 윤이 “동생 낳아 주세요”라고 부탁한 일은, 고모가 비출산을 고수할지 말지를 다시 생각하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지. 그러면서 몇 달 전, 윤과 나눈 대화가 생각났어.
“고모는 고모부랑 결혼했지요?”
“그렇지.”
“결혼했는데 왜 아이가 없어요?”
“음... 고모에게 사정이 좀 있어.”
“만약에 고모에게 아이가 있었으면 저를 덜 사랑했겠죠?”
“에? 그게 무슨 말이야! 있었어도 지금처럼 똑같이 사랑했을 거야.”
진지하게 묻는 윤이 너무 귀여워서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 언제 이렇게 커서 이런 대화가 가능해진 건가 기특하기도 하고 말이야. 한편으론, 결혼했는데도 아이 없이 사는 고모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을 윤에게 언젠간 고모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그러고 보니 윤이 고모에게 여러 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구나.
사실, 윤이 말고도 고모에게 ‘아이 낳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온 사람들이 있어. 대부분 가족이었지. 고모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했던 말들이야.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가족하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꼭 다투게 돼. 특히 고모의 엄마, 그러니까 윤의 할머니와 이 문제로 많이도 싸웠단다.
윤이는 나중에 엄마와 어떻게 지낼까 가끔 궁금해. 고모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 정말 오묘하다고 생각하거든. 엄청 사랑하는데, 온갖 기묘한 감정들까지 얽혀서 끈적끈적하다고 해야 하나. 뭔가 불편한 기운도 느껴지고, 사랑하는 감정도 들어서 정말 뗄 수 없는. 윤도 음식이 손에 묻어서 끈적거리면 불편하지? 비누로 씻으면 다시 보송보송해지잖아. 그게 다 큰 딸과 엄마의 사이야.
고모는 엄마와 통화를 하면 퉁명스럽게 말할 때가 많아. 이상하게 엄마한테는 친절한 말투가 잘 나오지가 않더라고. 정말 이상한 일이지. 고모가 별난 딸이라서 그런가 싶기도 해. 이 말을 하니, 갑자기 윤이 엄마와 외할머니가 통화를 들은 적이 있는지 궁금해지네. 윤의 엄마도 고모처럼 외할머니에게 불친절하게 대할 때가 있으려나. 나중에 고모한테만 살짝 알려줘. 헤헤
아무튼 고모는 아이 문제로 윤의 할머니와 싸움에 가까운 격한 대화를 많이 했어. 고모는 고모부와 고심 끝에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는데, 할머니는 받아들이지 못하셨거든. 고모가 아무리 고모의 생각을 말해도 할머니와 의견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어. 고모에게도 아이를 낳을지 말지의 문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는데, 고모를 이해해주지 않는 할머니가 원망스러웠지. 할머니가 고모를 많이 사랑해서 하는 말들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더 힘들었단다.
사랑하는 윤!
우리 윤은 점점 커가면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지? 그런데 참 슬픈 일은, 어른이 되어 갈수록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할 때 행복한지 잘 모르게 된다는 사실이야. 이 사회의 요구에 발맞추어 가다 보면 그런 건 점점 희미해져 버려. 하지만 세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예전엔 인생의 정답이 하나만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많은 사람이 깨닫고 있는 느낌이 들어. 각자의 신념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늘고 있어.
고모는 결혼과 출산도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특히 출산은 여성에게 굉장히 큰일이지. 직접적으로 몸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잖아. 윤의 엄마도 윤을 낳을 때 되게 아팠어. 물론 예쁜 윤을 품에 안고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아했으니 미안해하지는 말아. 윤의 엄마에게 윤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어. 너무 행복했다고 했어. 고모가 직접 들은 얘기니까 믿어도 돼.
윤이 어버이날 항상 엄마·아빠에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편지 쓴 거 기억하지? 감사를 아는 일은 중요해. 그렇지만 아빠보다는 엄마의 헌신과 노력이 육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현실이야. 출산 후, 아빠는 그대로 회사에 다니지. 그런데 엄마의 직장 생활에는 큰 변화가 생겨. 여기서 여성의 슬픈 운명이 시작돼.
아이를 낳고도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다면 고모도 고민 없이 아이를 가졌을 것 같아. 그런데 이 사회는 아직 여성에게 좀 더 가혹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 결국 퇴사한 여성 선배들을 많이 봤어.
고모는 자신이 없었어. 여러 면에서 여성에게 불리한 출산을 할 자신이 말이야. 고모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을 존경해. 용기 있는 선택을 했으니까. 그래서 윤처럼 사랑스러운 존재를 만나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윤의 엄마가 윤을 낳아서, 고모도 윤을 사랑할 기회를 얻은 거야.
고모는 그저 선택을 했어. 아이 없이 살기로. 고모처럼 이상한 사람은 분명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할 텐데 그러다간 불행해질 것 같거든. 아이를 원했었던 고모가 아이 없이 살기로 한 선택이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해. 어떤 사람은 고모가 이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하던데, 고모의 속사정을 안다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말이야. 그치?
사랑하는 윤아!
고모의 편지가 생각보다 되게 길어졌다. 윤이 나중에 이 편지를 읽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윤이 고모 나이쯤 됐을 때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장차 똑똑하고 당당한 여성으로 자란 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정말 궁금하다. 언젠가 고모와 윤이 마주 앉아 이 주제로 대화할 날을 꿈꿔 본다.
바라기는, 지금보다 세상이 더 진보해서 윤이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현재를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에 살기를, 혹은 아이 없이 살아도 그 선택을 존중받기를, 무엇보다 윤이 행복해하는 일을 잃지 않고 윤으로서 살아가기를, 고모가 두 손 모아 기도할게. 우리 윤이 고모 나이가 되려면 30년도 더 살아야겠지만, 그때까지 고모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게. 우리 윤이 지금처럼 계속 빛날 수 있게.
윤을 너무나 사랑하는 고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