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 서로를 알아가는 인터뷰 프로젝트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해서 나와 아내가 같은 사람은 아니다. 물론, 우리만 다르지 않다. 모든 부부가 그렇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부부가 어떤 시점에 만나 결혼한다. 5년 정도 살고 나면 “그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자기 좀 변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아무리 부부라도 1~2년 정도 깊은 대화를 하지 않으면, 자신을 알릴 기회가 없어진다. 자녀라도 태어났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 부부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만 13년을 함께했다. 아이는 없지만, 일도 같이하는 사이다 보니 대화는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우리도 너무 예민한 주제는 쉽게 지나치기 일쑤다. 싸우기 싫어서 지나친 문제가 많았다. 우리가 지나치는 문제가 아주 사소하다고 여겼는데, 10년 넘게 쌓이다 보니 문제가 됐다. 무언가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게 20년을 맞으면 자신은 그대로인데 상대방만 변했다고 여기기 십상일 테니.
결국,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 기회에 배우자를 잘 이해하고, 서로 지나친 문제를 대화로 풀어보려는 시도다. 이 대화의 끝이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시간일지, 이혼일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뷰는 총 12회에 걸쳐 진행하기로 했다. 서로 6회씩 진행할 예정이다. 우선, 너무 민감하지 않은 주제로 잡았다. 우리가 자주 다투면서도 민감하지는 않은 아내의 ‘쉼 거부’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그럼 시작해 본다.
아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주로 영상을 촬영하거나 편집하는 광경을 그린다. 아내는 지금 하는 ‘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내 자신도 가장 좋아하는 호칭이 ‘PD’다. 한 마디로, ‘일하는 존재’로 설명이 가능하다.
내가 보았을 때, 아내는 항상 작업이 최우선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우리가 이사할 때마다 가장 중요하게 꾸미는 장소도, 아내가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편집실이다. 우리는 12년 동안 여러 번 이사했다. 그때마다 아내가 작업할 공간을, 거실이나 침실보다 먼저 고민해야 했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일까. 아내와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스스로 ‘떠나는 존재’로 인식한다. 평소에 있던 자리에서 떠나야 성장한다고 믿는다. 어느 현명했다 불리는 사람도 한자리에만 있으면 변한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사람은 그 자리를 차고, 나올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계속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개똥철학)
이런 두 사람이 만났으니, 어딘가로 가볍게 놀러 가는 일도 쉽게 결정할 수 없다. 아내 마음에 여유가 생겨야 가능하다. ‘당일치기’도 정말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아내가 쉼마저 거부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런 아내에게 ‘쉼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어쩌면 첫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어떤 때 쉼을 느낄까.
"내게 쉼은 시쳇말로 ‘멍 때리는’ 시간이 아니야. 지금 일하느라 못한 무언가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무언가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예를 들어 보면, 내가 그동안 일하느라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여유롭게 앉아 책을 보며, 그런 시간을 갖는 게 내겐 쉼이야.
생각하지도 못했던 답이 돌아왔다. 나는 아내도 막연하게 어딘가로 떠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아내는 여행을 가서도 서점 가기를 코스로 넣었다. 나는 주로 여행책이 놓여있는 서가에서 살핀다면, 아내는 모든 서가를 돌아보기를 즐겨했다. 내가 속초시로 놀러 가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아내는 꼭 ‘동아서점’이나 ‘문우당서림’에 가자고 한다.
그동안 아내가 ‘독서를 어지간히 좋아하는구나’라고 느끼긴 했다. 그런데 쉼을 ‘책을 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시간’으로 여긴다니. 나도 독서를 좋아하지만, 내게 독서는 업무와 같다.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배우는 시간이다. 하지만, 나에게 독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에겐 일의 연장처럼 여겨지는데, 아내에게는 그 행위가 쉼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냥 아내가 쉬기 싫어하는 ‘일 중독자가 아닐까’만 의심했다. 그런데, 우리 차이가 이렇게 벌어져 있었다. 내가 아내에게 무심히 지나치는 일이 많았나 보다. 정말, 아내에게 어디론가 떠나자고 이야기했던 말들이 떠올라 미안했다. 하지만, 아내의 쉼이 많은 사람의 쉼과는 다를 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나) 다른 사람과 나의 쉼이 다르다고 생각해 봤어? 아니면 비슷할 것이라 예상해?
(아내) 사람마다 약간씩 다를 것 같아. 8명 정도의 작은 규모의 우리 회사 사람만 떠올려도 다 다를 거야. 물론 비슷한 사람이 몇 명 있긴 하지. 뉴스를 만드는 우리 회사 같은 경우, 편집장으로 일하는 동료는 나처럼 스타벅스에 앉아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고, 자신의 업무를 생각할 것 같아. 한 후배는 고양이와 함께하고, 관련한 책을 본다든지 강의를 들을 거야.
그럼 내가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나는 궁극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을 고민하고. 하지만, 그런 일이 없었을 때도 항상 다음 걸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 가령,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도 여기서 내 일이 끝나면, 다른 영상을 만들 때 나는 무엇이 만들고 싶을까를 항상 고민했어.
얼마 전에 다녀온 찜질방에서도 몸은 풀어졌지만, 잘 쉬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찜질방에 책을 들고는 가기는 했지만, 거기서는 책에 집중하지 않잖아. 편안하게 몸이 풀어지면, 대부분 스마트폰만 해. 책에 집중을 못 하니, 만족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내가 집중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늘 만족감이 떨어져.
(나) 그럼, 본인에게 쉼이란 일의 연장선에 있는 거 아니야?
(아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일을 생각하는 게 취미인가 싶기도 해. 내가 본업을 할 때는 다른 분야를 떠올리지 못하잖아. 내 일에 최선을 기울이니까. 여유 시간 아니면,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가 없잖아. 그러다 보니, 내게는 이렇게 하는 게 현실적인 쉼인 거지.
(나) 그럼, 쉼이 일의 연장선은 아닌데,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거네.
(아내) 어떻게 보면, 그런 거라고 할 수 있겠네.
(나) 혹시 본인이 쉼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내)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 근데, 그게 내 자의는 아니야. 걱정과 불안이 그 안에 섞여 있어서 쉼을 거부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 현재에 대한 불만족 같은 것이 섞여 있기도 해. 지금 직장이 불만족스럽지는 않아. 동료들도 좋고, 일의 형태도 무척 마음에 들어. 그런데, 지금 내가 서브로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잖아. 본업을 너무 열심히 하면, 그 일이 진행이 안 돼. 그럼 불만족스럽겠지, 당연히.
(나) 쉼을 생각하는 부분이 나와는 굉장히 다르구나. 난 일에서 벗어나 자신을 발견한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였거든. 내게 쉼이란, 어디론가 떠날 때 느끼는 거야. 그런데, 자기는 집에서 책만 봐도 괜찮다는 거야.
(아내) 그런 건 아니야. 나도 어딘가로 가고 싶기도 해. 그런데, 내 무의식이 어디로 가길 바라는 걸 구분하고 있는 것 같아. 이번 일의 경우, 내가 두 달 동안 쉬지도 않고 편집하고 촬영도 나가고 했잖아. 그 일이 끝나고 대휴로만 두 주가 생겼어. 그럼, 난 두 주를 잘 사용하고 싶어. 이 기간에 불만족스러웠던 일도 더욱 발전시키길 바라.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워크숍도 하자고 하는 거고.
그렇다고 온전히 쉬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거든. 당연히 그렇게 쉬고 싶은 마음도 있으니까. 다음 주에 제주도로 내 동생네 가족이랑 놀러 가기로 했잖아. 조카들과도 잘 지내다 오고 싶어. 아무런 고민 없이 놀다 올까, 그런 마음도 들고. 이런 생각을 하면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도 커져. 이런 이중적인 마음이 들어.
아내가 쉼을 이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나는 그동안 아내도 나와 같은 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13년 동안, 아내를 제대로 몰랐구나. 아내가 휴가를 떠나서도 불안해하며 나와 다투었던 일이 생각나 미안했다. 하지만 현대적으로 쉼은 ‘어딘가로 떠나는 일’로 변한 건 사실이다.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 쉴 수는 없을 테니까. 교통수단의 발전도 우리가 떠나는 상황에 도움을 준 부분도 있다. 아내의 생각이 갑자기 생기진 않았을 터, 궁금해졌다.
"음, 좀 나에게 쉼의 이미지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된 데에는 유고하지. 내 인생 역사도 생각해 봐야 하고."
(나) 그럼 언제부터 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온 거야?
(아내) 수능 끝나고부터였던 것 같아. 그전까지 쉬는 활동이 아예 없다고 여겼거든. 10대 때는 초등학교 마치면, 당연히 중학교로 가야 하잖아. 나에게 고등학교 진학하고 대학교까지 간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어. 그러니까, 중간고사 끝나면 기말고사가 있고, 이런 식으로 계속 시험의 연속이니까. 최종적으로는 수능이 목표고. 그럼, 당연히 수능이 있는 한 쉴 수가 없지.
(나) 아무리 그래도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쉬는 기간이 있을 거 아냐? 장인도 너 볼 때마다, 어렸을 적에 어디로 데리고 갔는데 그 기억이 좋으시니 말씀하실 테고.
(아내) 너무 어렸을 때 일이야.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야기잖아. 기억도 잘 안 나고.
(나) 그러니까, 철들 무렵부터 쉼이란 일의 연속 같았다는 거야?
(아내) 수능 끝나고,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시간이 2~3달 정도 있잖아. 그 기간에 살을 뺐어. 대학에 들어가서 새로운 생활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거야. 어느 지점에 목표로 해둔 일이 끝나면 다른 목표가 생기고, 그걸 이루기 위해 집중해야 했지.
사실, 내가 대학 입시에 실패했잖아. 내 성적에 비해 수능을 못 봤으니, 당시에는 실패했다고 여겼거든. 그리고 아래 단계 대학(한국외대)에, 그것도 2차 추가로 합격했단 말이야. 내가 가고 싶은 정치외교학과로도 못 갔고. 그래서 입학하자마자 전과해야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어. 그래서 고등학생처럼 공부했고, 입학한 학과에서 1등을 했어.
그렇게 전과에 성공하고, 2학년을 보내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어. 뭐, 그런 식으로 목표가 있는데, 어떻게 쉴 수 있겠어. 쉬는 법을 몰랐지. 쉰다고 생각하면 술 마시고, 취하면 된다고 여겼으니까.
(나) 그래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나 봐.
(아내) 그나마 사람들과 지낼 때, 가장 즐겁다고 여기는 시간이 술 마실 때였나 봐. 술을 마시면 새로운 사람과 관계도 쉽게 맺을 수 있었고, 막혔던 관계도 잘 풀어주고. 아마, 그런 관계를 맺는 행위를 즐겁게 여기고 만족했던 것 같아.
(나) 그럼, 고시를 포기했을 때 힘들었겠네.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니까.
(아내) 그랬지. 하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까. 1년을 준비해서, 교회에서 인도 선교를 가야 한다는. 그때 찍었던 사진에서 드러나지만, 그 시절의 나는 해방감을 맛본 느낌이었어. 고시에서 벗어났다는 후련함이지,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야.
인도 선교를 나간다고 해도, 돌아와서 취업해야 하잖아. 그래서 1년 동안 학원 강사 하면서, 계속 컴퓨터와 관련한 자격증을 땄어. 영어 학원도 계속 다녔고. 그 당시에 취업하려면 다녀야 하는 학원을 돌았지. 그리고 1년 간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방송국으로 입사했단 말이야. 거기서는 PD를 다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열심히 일했어. 그러니까 내가 노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거야.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
(나) 그 시기를 그렇게 보낸 걸 후회하진 않아? 억울하게 생각한다거나.
(아내) 별로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아. 후회하지도 않고. 내 10대부터 30대 초반까지 인생인데, 지금 내가 있게 해 준 다리 역할을 했다고 여기지.
(나) 그럼, 나를 만난 시기가 30대 초반, 그러니까 PD가 된 다음이네.
(아내) 맞아. 말도 잘 통하고, 살아가는 삶도 비슷하다고 여겨서 좋았어. 그런데 나와는 전혀 다른 인생 궤적을 그리고 살아온 당신을 만나면서 인생을 깊이 고민해 보게 된 거지. 그전까지 내 인생은 그냥 한 라인이었던 것 같아. 물론, 다채로운 일이 있었지만.
6살부터 쳤던 피아노를 초등 6학년 때 내려놓는 일도 있었고. 외고 가는 일도 엎어지고, 수능도 제 점수가 안 나오고. 고시도 포기했지. 내 삶의 방향은 계속 바뀌었어도 삶의 방식은 언제나 같았어.
10대 때부터, 좀 철이 들 무렵부터 취미를 경험하지 않고, 계속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고 봐도 좋을 듯해. 목표가 없는 인생을 살아보지도 않았고, 상상도 못 해 봤다로 설명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살아왔다고 보면 좋을 것 같네.
(나) 혹시,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 여겼어?
(아내) 그럴 거로 생각했나 봐. 그래서 당신이랑 그렇게 자주 싸웠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 당신에게 별생각 없어 보인다거나, 그런 식으로 지적했던 이야기도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내 무의식에서 나왔던 모양이야. 나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 물론, 당신도 마찬가지고.
생각해 보면 그랬다. 아내는 속초로 떠날 때도 마음의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쉽게 떠나질 못했다. 시간도 2시간 약간 넘게 걸리는데, 아내는 너무 멀다고 느꼈다. 어딘가로 떠나는 걸 굉장히 힘들어했다. 물론, 나도 계획을 세우고 떠나자고 하는 건 아니다. 가끔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당일로도 다녀올 수 있지 않나. 이런 아내에게서 장인어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아니, 기시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약간 그런 게 있어. 아빠 성향을 닮은 것도 같아. 아빠도 어딘가로 가야 할 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그것도 많이. 이번 여름에도 우리가 모시고 휴가 한 번을 가려고 해도 안 가시잖아. 난 그 정도는 아닌데, 아빠를 약간 닮은 느낌이 있지."
(나) 아버지가 원래 그런 성향이 있는 분이셔?
(아내) 잘 알잖아. 아빠는 자신이 익숙하다고 여기는 사람만 만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굉장히 꺼리고. 자동차로 어디 가려할 때, 도로가 막히는 것도 싫어해. 그때 운전하면 굉장히 피곤하다고 여기지.
(나) 어머니랑은 어때?
(아내) 엄마는 전혀 다른 사람이지. 어딘가로 가는 것도 좋아하고. 오히려 아무 곳도 가지 않으려 하는 아빠를 나무라시니까. 하지만 그래도 아빠는 안 가. 내 남동생이 아빠의 그런 모습을 안 닮아서 참 다행이야.
(나) 그럼, 자기는 가족에게 배우지 못한 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어떻게 만났어.
(아내) 이것도 책을 읽으면서 배웠어. 그러니까 현대인이 쉴 줄 모른다는 이야기가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됐어. 그리고 의외로 사람들이 나랑 비슷하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잘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그런 식으로 알게 된 거지.
뭐, 쉼을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그냥 쉬라고 하면 나에게는 폭력과 같지 않겠어. 나는 더 괴로울 뿐이야. 그러니까, 나에게 이번 2주의 휴식 기간은 어떤 식으로 보내야 하나 두려운 마음이 커. 어제 일기를 쓰는데 2주를 어떻게 보내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니까 쉬기 싫다는 게 아니야. 쉴 때도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거지. 이번 쉼을 통해 난 무엇을 이뤄야 해. 책을 몇 권 읽어야 하고, 내가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해야 해.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건가, 싶기는 하네.
(나) 어떻게 보면 나를 만난 일이 자기에게는 불행일 수 있겠네.
(아내) 불행은 아니지. 내 인생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는데, 왜 불행해. 내가 이런 식으로 사는 모습이 꼭 좋다고는 할 수 없잖아. 사실 나도 제대로 못 쉬는 삶에 불만족스러워. 그러니까 당신의 삶을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쉬는 일에 협의도 이루려고 하고 그렇지 않겠어. 나만 옳다고 여기면 당신이랑 못 살아. 그냥 혼자 살아가는 게 편하지.
많은 사람이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과 진짜 안 맞아. N극과 S극이야”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만 달라도 끝과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서로 약간만 달라도 그런 생각할 수 있잖아. N극과 S극이 아닐 수도 있는데. 오히려 내가 서 있는 곳이 극이라고 생각했을 때, 조금만 달라도 나와 저 멀리 다른 극에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해. 난 그런 생각을 최근 들어 자주 하거든.
생각해 보니, 나도 아내가 다른 생각을 하며, 내게 잔소리를 하면 저 멀리 어딘가에 있다고 느꼈다.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서 약간 부끄러워졌다. 반성하면서 우리가 만난 장소가 교회 아니었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교회도 현대 사회처럼 돌아간다. 교회 지도자인 사람도 마찬가지로 쉼을 모르고, 사람들 앞에 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신교의 중요 가치 중에 ‘안식’이 있는데, 그 안에서 안식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아내는 어떨까.
"나도 안식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 교회는 쉼, 안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궁금해."
(나) 그렇네. 안식보다는 활발하게 움직여야 좋은 신앙인처럼 이야기하잖아. 봉사도 많이 해야 하고.
(아내) 교회는 봉사를 강조하잖아. 쉬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봉사를 강요한단 말이야. 오히려 봉사하는 게 쉼이라고 생각하면서. 안식일에 원래 아무것도 하면 안 됐잖아. 돈도 쓰면 안 되고, 가게 문을 열어서도 안 되고. 그런데, 교회 봉사는 예외란 말이지. 도대체 교회에서 어떻게 안식을 생각하는지 내가 되묻고 싶어. 교회가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거 아니야?
(나) 이 시대와 성경이 쓰인 2000년 전과 달라서 그런 것 아닐까?
(아내)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안식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긴 하는 것 같아.
(나) 자기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잖아. 초등학생 때부터 예배 반주도 하고, 우리가 만난 교회에서도 열심히 하지 않았나?
(아내) 어렸을 때 봉사한 걸 생각하면, 너무 힘들었어. 별로 기쁘지도 않았고. 예배 때 반주하면서 내 연주 실력이 늘고 이런 게 기뻤지, 교회에서 반주로 봉사한 건 별로 기쁨이 없었지. 그냥 나의 발전에 영향을 준 일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 내가 피아노 반주를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 생각은 안 들어.
교회를 옮기고, 청년회 활동을 즐겁고 기뻤어. 고시 공부하다가 주말에 딱 하루 쉬는데, 집에 오면 밤이 될 정도로 봉사했거든. 그런 것들이 즐겁고, 별로 힘들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가 했겠지. 그러니까 종교도 자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 즐겁고 기쁘면, 이건 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해.
사실, 그 시절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퍼져서 쉬기보다는 교회에 나가서 청년부에서 지냈던 게 좋았던 거지. 어차피 쉬는 날이면 하루 종일 퍼져 있을 텐데. 우리 사회가 농경 사회일 때는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이 많으니, 새벽 기도가 자연스럽게 정착한 거잖아. 그렇게 사회의 변화에 따라 좀 더 변해야 하지 않을까.
(나) 그럼 자기에게 현대적 의미에서 쉼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해?
(아내) 책 <노력의 기쁨과 슬픔>을 최근에 완독 했어. 저자는 프랑스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야. ‘바칼로레아’라고 프랑스 대입 시험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에서 느낀 점이 있었어. 자신이 지도하던 한 여학생이 시험에 너무 부담을 갖는 거야. 엄청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어. 그 학생에게 ‘그럼, 공부가 더 안 된다’고 하면서 공부가 되게끔 평정심을 찾는 게 중요하다, 그런 내용이었어.
우리가 뭔가 하려고 할 때 노력하잖아. 그런데 그 토대가 울퉁불퉁했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거지.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까지 기다리면서, 찾아가야 한다. 이런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갔어. 근데 이제 오늘까지 이제 그 뒷부분을 좀 더 읽으면서 좀 이해가 돼서 좋더라고. 오늘 아침에 읽은 부분이 연결되면서 되게 좋은 거야.
모두 노력해서 뭔가 이루는 사회를 항상 지향하잖아. 노력하지 않는 거를 나쁘다고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뭔가 얻으려고 하면, 악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노력과 노력하지 않은 틈에, 그 중간 언저리에 휴식이 있다는 개념이 너무 새롭고 좋았어. 그 책에서는 자연스러움을 되게 강조하더라.
(나) 그럼 일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자기 같은 경우는 편집하고 있을 때가 쉬는 거 아니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노력하지 않아도 집중할 수도 있고.
(아내) 편집 자체가 ‘나’는 아니잖아. 그리고 일을 통해서는 성취감을 얻지. 나 자체가 성장하는 건 아니잖아. 나에게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일이 곧 나는 아니야.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면, 일이 사라지면 나는 없어져. 우리 부모님 세대가 그걸 경험하고 있고. ‘일이 곧 나’라고 생각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잖아. 건강이 안 좋아서, 무슨 문제가 생겨서 일을 못 하면 나는 없어질 테니.
일이 중요하지만, 전부가 되어선 안 돼. 일이 나에게서 빠져나갔을 때도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어야 해. 지금까지는 일이 전부라고 여기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그 사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려고.
내가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언제나 생각해. 지금 내 일도 그렇게 여기고. 안 그럼, 돈 많이 주는 회사로 이직하지. 나는 돈을 따라 살고 싶지는 않거든.
아내가 노력하겠다는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살았던 방식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살아가야 할 텐데, 그게 어디 쉽겠나.
그러고 보니, 나는 나를 성장하도록 하는 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도 이걸 이해하도록 조금 더 노력해 봐야 하겠다. 그래야 평생 함께 살아갈 아내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