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부가 쌓아온 소통의 결과
부부는 참 어려운 관계다. 사이가 가까우면 가까운 데로 멀면 먼 데로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우리는 지난 12월 초에 결혼 만 7년을 맞은 8년차 부부다. 교회에서 만나 결혼했고, 결혼 후에는 함께 일했다. 24시간 붙어 지내는 부부라고 보면 된다. 교회 후배들은 잉꼬부부라고 부러워한다. 우리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걱정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교회에서 잉꼬부부로 우리를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 싸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과연 부부는 지금 어느 지점에 있을까. 24시간 붙어 지내는 부부의 일상은 어떨까.
우리 부부는 대화를 많이 한다. 뭐, 늘 붙어서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돈 안 들이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대화가 답이다. 덕분에 많이 싸우기도 한다. 자기주장도 많고, 가치관 격돌도 잦으니 어쩔 수 없다. 교회에서 만났다지만, 알고 지낸 기간만 오래됐다는 사실만 빼면 깊이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각자 30년 넘게 다른 가족과 다른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싸우지 않고 지낼 방법이 없다.
대화 많이 나누고, 자주 싸우면서 관계가 좋아졌다고 하면 조금 웃기겠지만, 우리 부부 관계는 발전적이었다. 대화로 서로 이해할 배경을 마련했고, 덕분에 싸우면서 각자 모난 부분이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 부분이 다듬어졌다고 해야 하나.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 부부가 대화하는 과정을 회상해 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소통하던 아내와 소통을 두고 이야기하며, 7년을 돌아보려니 조금 쑥스런 표정이 되었지만.
아내: 모든 일은 다 먹고사는 것에서 시작하는 듯 해. 우리 부부의 애틋함도 밥에서 출발했다고 기억하니까. 결혼하면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게 된 오빠가, 몇 개월 동안 매일 아침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에 출근하는 아내를 위해 밥을 지어 주었지.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챙겨 주고. 여느 신혼부부처럼 훈훈하고 즐거운 아침을 맞았던 기억이 나는군.
남편: 밥으로 행복했던 날은 반년이 가지 못했잖아. 내 프리랜서 업무가 늘어나고, 아내님 야근이 잦아지면서 밥을 먹을 날이 많이 줄었고. 아내님이 야근을 하니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없었고, 나는 새벽까지 수정해서 보낼 작업물이 늘면서 아침을 준비할 수 없게 됐지. 당신 직장 동료들은 “남편 사랑이 식었네”, “얼마 못 간다고 했지”라며 놀렸다고 했지? 조금 많이 미안했지만, 어쩌겠어. 현실은 현실이니.
대화는 신혼 초에 있었던 식사 준비 이야기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성으로 준비하던 밥이, 바쁜 날에 치어 외식으로 바뀌었다. 외부에서 회의나 여러 일정이 있는 날이면, 내가 아내 회사 앞으로 갔다. 아내가 야근을 하면 회사 앞에서 밥을 먹었고, 야근이 없다면 퇴근하면서 지하철 역 부근에서 식사했다. 기분 좋은 날이거나, 우리가 지키는 기념 주간이 있는 날이면 좋은 식당에도 갔다. 어느덧 엥겔지수가 엄청 높은 2인 가구가 되어 있었다.
어느덧 식사 문제는 우리 부부싸움의 주요 원인으로 자리 잡았다. 재정 지출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내는 외식 그 자체를 힘들어했다. 결혼 전, 아내는 집을 나가서 살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집에서 살면서 ‘엄마가 차려 준 식탁’을 만끽했다. 집밥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내는 사치로 느낀다. 거기에 가정이 있다면, 가족이 모여 집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잦은 외식이 아내의 가치문제를 건드렸던 것이다.
내 생각은 달랐다. 맞벌이를 하던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늦은 시각까지 일하고 귀가했다. 어머니가 차려 주는 식탁은 없었지만, 새벽에 차려둔 찌개나 반찬으로 알아서 밥을 먹었다.(물론, 먹고 싶은 건 주로 스스로 해먹기도 했다.) 대학생 때부터 자취를 하다 보니, 가족 식사는 일주일에 단 한 차례 일요일 오전에만 가능했다. 우리 가족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날에도 남동생과 나는 어머니를 도와 밥상을 차렸다. 음식 준비와 설거지도 나눠했다. 어머니가 두 아들과 남편을 오랜 시간 그렇게 교육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항상 강조했다. 결혼하면 아들들이 함께해야 하니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두 가족 문화는 결혼 후에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아내 부모님과 식사를 하면 아내 어머니께서는 항상 집밥을 차려 주셨다. 내 부모님과 식사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외식을 했다. 아내 부모님은 정성을 담은 밥상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 부모님은 모이는 사람 누구도 힘들지 않은 밥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두 가정에서 자란 우리 부부의 다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외식과 관련한 우리 싸움은 늘 이 말로 끝난다. 나는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장을 보고, 요리하는 모든 시간에 내 인건비를 넣는다면 과연 어떨까”라고 묻는다. 아내는 물론, 가사를 전담하는 지인들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처음에는 어이없어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질문이 이들에게도 묘한 의심을 남긴다고 한다. 내 인건비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사와 관련한 인건비는 과연 인정받고 있는가.
최근 아내가 퇴사했다. 아내도 이제 프리랜서로, 자기 직업을 만드는 중이다. 중요한 건 아내도 가사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건 라이프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 관심이 생겼다고도 한다. 이 과정을 직접 경험하면서 아내는 가사 일과 관련한 ‘인건비’에 100% 동감한다. 물론 여러 이유로 외식은 여전히 꺼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한결 자유롭다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아내: 당연하게 여겨서 눈에서 지운 노동이 얼마나 많을까. 엄마하고 밥 먹을 때도 맛있는 거 사 먹자고 해야겠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좋은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그동안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했다고 전하고 싶어.
남편: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그동안 수고한 나는?
아내: ......
남편: 돌이켜 보면,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는다는 걸 상상해 본 적은 없었어.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아이를 낳는다는 의미를 깊이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어머니를 보면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게 사실이고. 게다가 나는 지금도 이 세상이 아이를 위한, 아이에게 그다지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내: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내게 주도권을 주어 고맙게 생각해. 나는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일과 성취, 자아실현이 중요했지만, 결혼했으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여겼어. 결혼하고 1년 간 여러 대화를 나눴었지? 그러고 보니, 이 문제로도 많이 싸웠었네. 나는 아이를 바랐고, 남편은 그렇지 않았으니.
남편: 결국 아내 바람대로 아이가 생겼잖아. 테스터를 통해 먼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출산에 회의적이었던 내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던 날이 생각나.
아내: 맞아. 그리고 둘이 바로 산부인과로 향했었지? 초음파로 임신 사실을 확인했는데, 그 순간 너무 감격해 울어 버린 남편 모습을 보고 정말 행복했어. 남편이 내게 고맙고 미안하다 말해 준 것도 고마웠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유산을 경험했다. 아이 심장 소리를 듣고 바로 다음번 검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11주 만에 유산했다.) 아이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내는 망연자실했다. 산부인과 두 곳을 더 돌았다. 아내가 검사가 잘못된 것 같다고, 내게 다른 병원으로 가자고 계속 독촉했다. 결과는 모두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아이를 떠나보냈다.
유산한 아이를 몸에서 덜어내는 수술을 했던 날, 우리 부부는 종일 오열했다. 아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촬영 현장에서 힘들어 잠시 주저앉았던 날을 생각하며, 그날 때문인가 마음 쓰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죄책감이라 사람들은 말했지만, 아내는 쉽게 덜어내지 못했다. 나는 우울감으로 오랜 기간 고생했다. 상담을 전공한 친구에 미칠 것 같다고 울며 전화하기도 했다. 정말 ‘이래서 미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를 바라지 않았지만, 아이가 생긴 순간부터 내 마음에는 그 아이를 품는 큰 공간이 생겼다. 아이가 생긴 걸 안 순간부터, 아이를 기다리며 일기 애플리케이션에 매일 일기를 썼다.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이를 위한 어떤 부모가 되겠다는 마음도 그곳에 가득 담았다. 아내와 나는 증거를 남기자며, 서로의 다짐을 음성으로 기록해 일기장에 담아두기도 했다.
유산을 경험하고, 벌써 6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날의 일기는 아직 내 에버노트 한편에 남아 있다. 그날 이후, 당시 기록을 다시 펼쳐본 기억은 없다. 아니 펼쳐볼 용기를 아직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날의 기억을 지울 비겁함도, 결단력도 부족하다. 아내와 가끔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여전히 눈물을 짓는다. 남들은 별 거 아닌데 유별나게 행동한다고 지적하지만, 우리는 보지도 못한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 심정이라고 여기며 넘긴다.
아내: 난 유산하고 바로 아이를 가질 줄 알았어. 6개월 후면 아이를 가지겠다고 생각했는데, 6년 동안 아이가 없네. 남편이랑 이야기하면서 아이를 갖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어떤 과정이 옳은지 많이 고민했던 것 같아.
남편: 이 부분은 양가 부모님과도 아직 소통 중이지? 부모님은 바라시고, 우리는 ‘아직’이라고 대답하며 우리 의견을 말씀드리고 있으니. 함께 이야기한다지만, 여성이라 압박을 더욱 느꼈을 텐데. 고생이 많았어.
에피소드가 두 개로 끝이라니, 무척 아쉽다. 짧은 지면에 우리 부부의 7년을 담기보다, 큰 줄기가 된 이야기 중심으로 펼치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하여튼 우리 부부는 인생 대소사 모두 아주 길게 대화한다. 하루 몇 시간 정도가 아니라 몇 년씩. 우리 부부에게 소통은 한 순간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과정 그 자체인 듯싶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가. 교회에서 젊은 부부가 가장 선망하는 부부 1순위인 집사 부부가 충고 아닌 충고를 들려주듯 우리에게 건낸 말씀이 요즘 자주 떠오른다.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쉽게 말로만 하면 다 소통인가? 내는 30년 넘게 남편이랑 소통하다 이혼할 뻔 했다. 참말로 사람들이 왜 그리 쉽게 소통, 소통하는지 모르것네.
*이 글은 월간 <빛과소금>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