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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유영 Aug 22. 2021

안경은 소중한 물건인가

고양이가 떨어뜨린 안경에 대한 감정 by 믹서

나의 고양이 리앙이와 랭이는 가벼운 물건들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는 일을 즐긴다. 특히 리앙이는 관심받기 위해 그러기도 하는데, 오늘 결국 일을 냈다. 오빠가 책상에 올려놓은 안경을 툭 쳐서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다행히 안경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곧 들려온 오빠의 말에 나의 마음은 확 굳어버렸다.


리앙아, 괜찮아. 안경 또 사면돼

안경이 밥그릇인가. 안경이 유리컵인가. 오빠의 안경은 테와 렌즈까지 무려 십만 원이 넘는다. 게다가 라식 수술 같은 걸 하지 않은 오빠에게 안경은 신체의 일부와 같다. 비록 노안이 와서 글을 볼 땐 안경을 벗지만, 여전히 안경은 물건 이상의 그 무엇이다. 안경이란 실로 중요한 거시기 아닌가! '안경은 얼굴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묵은 불만, 안경 보관


차분히 앉아 글을 쓰다가 또 욱 할 뻔했다. 안경을 대하는 오빠의 태도에 불만이 있었던 건 좀 됐다. 여기저기 안경을 무심하게 던져두는 통에, 오빠의 안경을 졸졸 쫓아다닌 지 어언 9년. 신경 써서 안경을 두지 않으면 리앙이와 랭이의 장난감이 되기 일쑤다.


주방 테이블이나 선반, 책상 모서리 끝에 아슬아슬 걸쳐져 있는 안경을 발견하면 헐레벌떡 안경을 주워 안전한 곳에 모셔두곤 했다. 렌즈가 바닥으로 향해있는 날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리앙이가 우아하게 렌즈를 즈려밟고 갈 수도 있고(이런 최악의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음에 감사), 알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기 전에도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벗어 두길래 안경집을 손에 쥐어 주며 당부했다. 안경도 밤엔 집에 가고 싶을 테니 넣어두고 자면 어떻겠냐고. 늘 그렇듯이 오빠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응! 알겠어!"


하지만 나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갔다. 오빠는 단 한 번도 안경을 안경집에 넣은 적이 없다. 화도 내 보고, 어르고 달래기도 했지만 안경을 대하는 오빠의 태도에는 변화가 전혀 없었다. 근데 희한하게 오빠의 안경은 크게 부서진 일이 없다. 내 염려와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안경 스타일에 따라 얼굴 느낌이 확확 바뀌는 터라,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안경을 바꾸긴 한다. 패션 때문에 안경을 사는 거지, 안경이 망가져서가 아니다. 하여튼 안경을 막 다루는 것치고는 그간 안경들이 무사한 게 신기하다.


그래서 나의 분노도 꾹꾹 누를 수 있었다. 큰 사고가 없었으니 말이다. 가끔 안경이 아무 데나 던져져 있을 때 "안경 좀 잘 보관해!" 하고, 미디엄 템포 정도의 화를 내는 걸로 끝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


안경이 처음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안경이 깨지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 화가 난 거라면 보통 일은 아니다. 그간에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안경이 무사하니 일단 넘어갈 일이었지만, "안경 망가지면 또 사면된다"는 오빠의 한 마디가 싸움으로 이어지게 됐다.


"오빠는 안경이 안 소중해?"
"돈이 많으신 가봐요"


전형적인 싸움의 언어들을 토해냈다. 물건을 막 대하는 오빠의 태도가 싫다고, 안경은 결코 싼 물건이 아니라고. 가만히 듣던 오빠가 말했다. 안경은 안 소중하다고. 우리 고양이 리앙이가 소중하지, 안경은 하나도 소중하지 않다고 했다.


사실 오빠는 한 번도 리앙이와 랭이에게 소리 지른 적이 없다. 거울을 깨고, 맥북을 떨어뜨려도 성질 한번 내지 않았다. 반면 난 고양이들이 내는 사소한 사고에도 파르르 떤다. 집에 있는 물건들이 어떻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거다. 고양이들을 매우 사랑하지만, 물건들도 중요하기에 늘 걱정을 안고 산다.


오늘의 싸움은 나의 성찰로 싱겁게 마무리됐다. 비록 안경은 안경집에 보내지 않지만, 고양이들에게는 한없이 무한한 사랑을 주는 오빠가 아닌가.


어쩌면 안경은 소중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물건들에 주의를 기울여 다루는 태도와는 별개로 말이다. 책상 안 쪽으로 안경을 밀어두는 세심함을 놓친 나를 탓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안경을 떨어뜨린 리앙이에게 괜찮다고 안아주는 오빠의 넓은 마음에 감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소중한 것에 마음을 쏟는 오빠에게 한 수 배운 싸움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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