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님의 10문 10답
01 이 나라는 나의 첫 번째 파견지다.
02 여기서 나의 밥친구는 현지 친구들이고, 주로 닭요리를 먹는다.
03 어제 점심에/지난 주말에 나는 한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04 같이 밥을 먹은 사람들은 현지 친구들이다.
05 밥을 먹으며 주로 방글라데시 성차별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06 나는 그 이야기를/생각을 하며 종교와 개발은 딜레마라고 느꼈다.
07 요즘 내가 제일 자주 하는 혼잣말은 ‘행동해야 한다’이다.
08 최근에 나를 즐겁게 하는 건 현지 사업 활동을 재개한 것이고, 가장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최근 방글라데시 시골 지역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 및 그로 인해 불안해하고 있는 친구들 때문이다.
09 코로나19는 나에게 진공상태이다.
10 내년 이맘때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인신매매 방지를 위한 수사역량 강화 사업을 하고있을 것이다.
방글라데시에는 언제,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올해 1월에 국제기구에서 일하게 되면서 처음 방글라데시에 왔어요. 하지만 코로나19로 일시 귀국하게 되면서 한동안 한국에서 원격 근무를 이어나갔고요. 저는 방글라데시에 좀 오래 있을 계획이 있어서, 기존에 파견 갔던 기관과의 계약이 끝난 후에 다른 기관을 통해서 8월에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오게 됐어요.
어떤 이유로 방글라데시에 오래 계시고자 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어, 사실 여기서 좋은 분을 만나서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거든요(웃음). 그래서 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앗,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실례가 안된다면 두 분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애인은 다카에 있는 한식당에서 만났어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처음에 되게 잘 통했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사소한 개그코드부터 습관, 가치관 등 많은 부분에서 꼭 알맞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자연스럽게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관계로 발전했고요. 다름을 넘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하는 중이에요.
‘현지 친구들’이라고 표현하신 밥 친구들은 동료분들 이신가요? 식사를 주로 해 드시는지, 밖에서 드시는지도 궁금해요.
점심은 회사에 있다 보니 동료들과 밖에서 먹고요, 저녁이나 주말 같은 경우에는 애인이나 애인 가족들, 또 여기서 알게 된 다른 친구들과 같이 먹어요. 방글라데시 음식을 만들어먹기도 하고, 저는 불닭 볶음면 같은 한국음식을 소개해주며 같이 먹기도 해요.
현지 음식은 어떤 것이 있나요?
향신료가 많이 들어가는 커리 베이스의 요리를 주로 먹고요. 비리아니(Biryani)라고 하는 볶음밥도 많이 먹는데, 소고기, 양고기 등 종류별로 있어요. 우리나라 음식과 비슷한 것들도 있는데, 닭발, 향신료가 들어간 꼬리곰탕, 그리고 소곱창도 먹어요. 곱창은 레스토랑에서 팔지는 않지만 가정식으로 튀겨 먹더라고요.
해외에서 한식당의 존재는 참 소중한데요, 한식당에 자주 가시는 편인가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가는 것 같아요. 축하할 일이 있다든지, 무언가를 기념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든지 할 때요. 지난주에는 제 친구의 여동생이 한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좋은 성과가 있어서 축하하기 위해 한식당에서 모였어요.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국가라 술을 마시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혹시 맥주 한 잔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주류 판매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이 한 분 계세요. 그분을 통해서 한 박스씩 받아오는데, 이것도 매번 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정부 방침에 따라 아예 주류 유통이나 판매가 금지되는 시기도 있거든요. 그래서 한 번 살 수 있을 때 많이 사두는 편입니다.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호텔이 시내에 서너 군데 정도 되는데, 작은 맥주 한 잔에 9,000원 정도로 굉장히 비싸요. 우리나라처럼 퇴근 후 ‘가볍게 한 잔’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죠.
최근에 밥을 먹으며 방글라데시의 젠더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셨다고요. 사실 식사 중에 가볍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이런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셨나요?
지난 9월에 방글라데시 시골 지역에서 집단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는데, 가해자 다섯 명이 범죄의 전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해 SNS에 공유했어요. 굉장히 야만적인 수법이죠. 9월~10월 사이에 이 영상이 퍼지면서 사람들의 극도로 흥분했고, 이와 관련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어요. 워낙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이라 요즘 많은 사람들과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법학을 전공해서 인권법, 형사법, 제도개혁 같은 부분이 관심이 많기도 하고요.
종교에서 파생된 문화와 관습, 사람들의 의식으로 인해 방글라데시의 여성 인권은 너무나 취약한 상황이에요. 문화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통치구조와 행정제도 와도 관련이 있고요. 방글라데시는 사실상 독재 체제이고,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요. 성범죄를 포함한 범죄 신고가 있어도 경찰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고요. 독재자도 문제지만 이들을 둘러싼 정부의 총체적인 시스템에 한계가 많은 상황이죠. 많은 인권 단체와 UN기구가 거버넌스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참고로 시위가 계속되면서 최근에 가해자들에게 최대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되었어요 가해자들은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론은 이들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요.
자주 하는 혼잣말이 인상적이었어요. 특별히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처음 개발협력에 뜻을 두었을 때와 비교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행동하기를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의 생각이나 가치가 업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가령 길거리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때, ‘내가 너무 무뎌졌나? 열정을 잃었나?’라는 생각을 하곤 해요.
코로나19로 사업에도 지장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최근에 사업을 재개하게 되어서 즐거우시다고요.
팬데믹 이후로 사업장에 가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한동안 원격으로만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는데요. 최근부터 현장 모니터링도 하고 사무실에 나가서 동료들도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주 4회 정도 현장에 가고 있는데, 지연되던 사업이 다시 진행되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이 있어요.
반면에 앞서 말씀하신 사건 때문에 여성들의 불안감이 높아진 상황에 마음이 안 좋으시다고요.
그 사건 이후로 여성인 친구들이 밤에 자유롭게 나가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다닐 수 없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신체 노출이 있으면 안 되고,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하고, 이런 제약들이 늘어가요. 친구들의 불안감이 높아진 모습을 보며 기분이 안 좋았어요.
코로나19를 ‘진공상태’라고 표현하셨어요. 왠지 아노미 상태가 떠오르는데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었나요?
올해 2월에 기관 옥상에서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다 코로나19 소식을 처음 들었어요. 마치 농담처럼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데 여기 방글라데시까지 올까?’라는 얘기를 나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록다운 상태가 되고, 저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러다 여름이 지나고, 또다시 방글라데시로 돌아왔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어요. 2020년에 일과 개인 삶에서 이루고 싶었던 것들이, 시간은 흘렀는데 진전은 없이 그대로 진공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그 시간이 통째로 증발해버린 것 같기도 하고요. 돌아보면 안타깝고 아쉽지만, 사실 저만 이런 게 아니잖아요. 모두가 이런 상태이고,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불평할 곳도 없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년 이맘때 Human trafficking 관련한 사업을 하고 있을 예정이시라고요. 현재 맡고 있는 프로젝트는 보건쪽이라고 들었는데, 어떤 관계가 있나요?
사실 저의 희망사항인데요(웃음). 제 전공이나 관심사와 맞는 일이라, 관련 사업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이 일을 할 수 있는 경로가 여러 가지일 텐데, 어느 기관 소속이든 상관없이 기회가 있다면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어요. 아직은 희망만 하고 있습니다(웃음).
진보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머릿속에 일과 관련된 생각이 많으신 것 같다고 느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요?
복잡한 감정이 들어서 생각을 좀 해봐야 될 것 같아요. 가치 있는 일이고 여기에서 오는 만족감 또한 크지만, 처음에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경제적 안정성에 대해 점점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정착을 준비하면서 개발협력의 가치와 경제적 안정성을 함께 고려하다 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개인적인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두 가지를 다 가져가고 싶은 거죠.
'행동하여야 한다’는 진보님의 한마디가 가슴에 울림으로 남는다. 한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속에서 나눈 대화는 (예상치 못하게) 조금은 진지하게 흘러갔지만, 그가 마음을 두고 있는 가치에 대해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다음호에는 활동가들의 일과 사랑, 사랑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실어봐야지. 그리고 그땐 진보님을 일순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