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래된 현재' 국제개발협력 선배와의 만남
개발인류학자들은 사업국가 현장에서 프로젝트의 형성과 수행을 이끄는 주체들을 ‘지역 개발 중개인 (Local Development Brokers)’이라 개념화하고 이들의 존재와 역할에 주목했습니다. 이 ‘로컬 브로커’들은 “사업 대상자와 개발 기관 사이의 교차점”(Bierschenk, et al., 2002; Olivier de Sardan, 2005)에 위치하며 지역의 욕구를 개발 프로젝트에 적합한 형태로 치환하여 ‘사업화’하고 외부 자원과 연결시킵니다(Beirschenk et al.,2002; Knodel, 2021). 원조기관 및 개발NGO의 현지직원, 마을 촌장, 지역 정부 관계자, 마을 협동조합 대표 등이 모두 이러한 개발 브로커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오늘날의 개발사업에서 해외 후원자가 직접 사업 참여자(수혜자)에게 가 닿을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탄생한존재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Bebbington 2005, Wallace et al. 2006).
<중간자들> 시리즈는 두 명의 한국인 ‘현지 직원’의 경험을 로컬 브로커라는 개념과 연결하여 조명하고자 합니다.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소장님과 이배근 아동학대예방협회장님입니다. 두 사람은 각각 INGO라는 표현도 낯설었던 1960년대, 해외 원조단체가 한국에서 시행한 개발사업현장에서 사회 초년생으로 일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외원단체’ 직원에서 시작해 원조 종결과 기관의 독립을겪고, 이후 한국의 아동 인권과 복지 분야 전문가로 한 길을 걸어온 이들의 경험은 로컬 브로커라는 존재와 현재 우리가 함께 일하는 사업국가의현지 직원에 대해 생각해 볼 지점을 제공합니다.
선배님께서 집필하시고 국제아동인권센터(InCRC)에서 펴낸 책 <꼭, 가야겠어요?>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화여대 불문과 졸업 후 지인의 소개로 당시에 ‘외원기관’이라 불리는 해외원조단체 한국 지부에서 일을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원조나 농촌지역개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으셨는지, 어떤 계기로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지인 한 분이 날 보고 딱 당신한테 맞는 직장이 있는데 거기서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지원을 했어요. 그때는 솔직히 NGO, NPO 그런 것도 잘 모르고, 심지어 사회사업에 대해서도 몰랐을 때예요. 어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막연히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걸 위해서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일을 한다면 누군가에게 그래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거든요.
사실 우리 가족은 이북에서 피난을 왔어요. 모든 재산을 다 두고 여기에 와서 빈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부모님들은 얼마나 힘들고 바쁘셨겠어요. 그래도 3남 2녀 모두 대학 공부를 지원해주셨지만 장래희망 이런 걸 물어보신 적은 없었어요. 저 역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 정도의 생각만 있었어요.
다만 1960년대에 여성 대학생에게 졸업 후 진로에 대해 물으면 98% 정도가 현모양처가 되길 원하고 2%만이 일하기를 원하는 정도였는데, 제가 그 2%의 사람이었던 거죠.
여성으로서 대학 교육을 받고 소위 명문대인 이화여대를 졸업하셨는데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다니 새삼 시대의 변화가 느껴져요.
그 당시에는 직업 보다도 대학을 졸업하면 좋은 곳으로 시집갈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어요. 좋은 학교에 가는 목적이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이라는 게 현실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2%의 학생들은 의사, 간호사, 변호사처럼 특별한 공부를 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문과 계통인 나는 무얼 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기관에서 제가 할 일이 있었던 거죠.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후원자에게 쓴 편지를 번역하는 일이었어요. 저는 불문과를 졸업했는데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었기에 영어로 편지 정도는 번역할 수 있으니까 채용이 됐어요. 해당 기관에서는 1966년부터 68년까지 2년 정도 일했어요.
당시 외국 NGO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이나 사회적 인식은 어땠나요?
당시 최고의 직업이었죠. NGO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던 시대니까 기관 때문이라기 보다는 일하는 조건 때문에 좋은 일터로 인정 받았지요. 그때는 토요일도 다 일했는데 우리는 닷새만 일한 거예요. 외국인들이 디렉터고 딱 시간 되면 끝나고 하니까 여성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었죠. 업무 시간 중 점심시간 외에도 오전 오후에 15분 브레이크가 있었는데, 우유와 도넛이 제공됐어요. 업무 환경이 서구적이었다고 할까요. 급여 수준도 당시 교사 월급이 70만 원이었는데 150만 원을 받았으니 굉장히 대우가 좋았죠. 그때는 NGO라는 말도 없었어요. 우리는 외원단체라고 불렀어요. 한국 기관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단체가 한국에 와서 좋은 일을 하는 거라고 이해하고 있었죠.
처음에 서신번역 업무를 하시다가 이후에 농촌지역개발사업 현장 업무도 맡게 되신 건지요? 당시 경험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 일을 시작했던 그 단체에서 서신번역 일을 하다가 세이브더칠드런으로 이직을 하면서 농촌개발사업 업무를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첫 직장이 보수나 근무환경이 좋긴 했지만, 번역하는 편지 내용이 비슷하고 반복적이다 보니 30장 편지를 번역하는데 2~3시간이면 끝나버리곤 했어요. 뭔가 더 큰 꿈을 펼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세이브더칠드런에서는 31년을 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을 만큼 신나게 일했어요.
이직 과정은 어떠셨어요? 혹시 시험 같은 것도 보셨는지, 어떤 역량이 요구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세이브더칠드런이 한국에서 전쟁고아를 위한 구호사업에서 지역개발사업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들어가게 된 건데요. 한두 시간 시험을 본 게 아니라 오전 오후를 나누어서 종일 테스트가 진행됐어요. 첫 번째로는 미국인 디렉터에게 영어 테스트를 받았는데 후원 아동이 아픈 상황을 가정하고 이때 후원자에게 아동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지 편지를 작성해보라는 것이었어요. 오전 영어 시험을 마치고 점심 먹고 다시 가니까 지역사회의 상황에 대해서 서술하고 그중 핵심적인 부분, 가장 열악한 부분이 무엇이고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사업 계획서를 작성해보라고 하더라고요. 두 가지 역할에 대한 테스트를 받은 거죠.
세이브더칠드런에서는 어떤 일들을 주로 하셨었나요?
처음에 테스트에 합격을 하고 나니까 디렉터가 현장으로 갈래 사무실에서 일할래 그래서 “나 결혼해서 나 현장 못 가요. 나는 사무실에서 번역할게요.” 그랬죠. 지금은 경기도 여주 같은 곳까지 1시간이면 가잖아요. 당시에는 진짜 반나절을 걸려서 가고 한 번 가면 거기서 자야 하니까 결혼한 여성으로서 현장직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처음에는 사업 조정관이라고 부르는, 그러니까 코디네이터죠, 농촌에서 일하는 현장 직원들이 작성한 반기별 사업 보고서를 본부로 보내기 위해서 번역하는 일을 했어요. 근데 필드에서 일하는 분들이 쓴 보고서가 제가 보기엔 논리적이지 않아서 다 고쳐서 번역을 해야 하는 거예요(웃음). 사업 활동에 대한 내용, 성과, 어려웠던 점 이런 부분이 보고서에 있었는데 저는 농촌 사정도 몰랐어요. 어느 정도로 제가 서울 사람이었냐 하면 행정구역 무슨무슨 ‘군’이라고 적힌 말 뜻을 몰라서 밀리터리라고 번역을 했어요. 알고 봤더니 지역 본청 이런 의미로 쓰인 거였죠. 이런 상황이다 보니까 나도 현장에 가서 일하고 싶은 거예요. 보고서도 내가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고 (웃음).
그렇게 농촌지역개발 사업 현장으로 가게 되신거군요.
사무실에서 하는 번역 일은 1년을 못 견디겠더라고요. 경기도 정도는 가까우니까 현장 업무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다행히 그즈음에는 사업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서 현장에서 살지 않아도 이틀 일하고 다시 와서 보고서 쓰고 이런 식으로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경기도 지역 사업 조정역(Field coordinator)을 지원해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했어요. 제가 <꼭, 가야겠어요?>라는 책에도 썼던 이야기인데, 농촌여성개발 사업을 주로 진행했죠.
오피스 근무를 하시다 직접 사업현장에 가 보시니 어떠셨나요? 앞에서 ‘군’을 밀리터리로 번역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얘기해주셨는데, 혹시 현장에서 서울사람으로서 느낀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하나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그날이 제 생일이었어요. 그날 무슨 잔치를 한다고 돼지를 잡았대요. 그래서 돼지고기를 먹나 보다 하면서 좋아했죠. 그런데 세상에 점심을 주는데 밥그릇에다가 밥을 넣고 그 위에다가 미역국을 퍼서 주는데 돼지고기로 미역국을 끓인 거예요. 나는 그때만 해도 한 번도 돼지고기로 미역국을 끓인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아무리 내 생일이고 미역국이지만 못 먹겠는 거예요. 그때가 내가 처음 필드에 나가서 밥을 먹기 시작한 때라서 놀랐는데, 그 이후로는 뭐든지 잘 먹게 됐죠.
무엇보다 필드에 가서 일을 하다 보니까 내가 역부족인 거예요. 주민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니즈를 적절하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내 실력이 역부족이다, 하는 게 딱 느껴져서 이후에 미국에서 진행한 관련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계기가 됐어요.
어떤 점에서 부족하다고 느끼셨어요?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당시 제가 들어간 지역은 경기도 산골 오지마을 이었는데, 이미 70년대부터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지역개발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었어요. 저 같은 직원들의 일은 점점 줄어서 기술적인 부분만 하는 거였어요. 우리가 중요한 부분은 짚어주지만 그분들이 직접 지역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도록 했어요. 말 그대로 우리의 역할은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이고 조정역(coordinator) 이었죠. 우리가 뭔가를 하는 게 아니었던 거죠. 저는 그 접근법이 너무 좋았거든요. 근데 이분들이 “저희는 가방끈이 짧아요” 이러면서 저를 외부에서 온 많이 배운 사람, 뭔가 자기들과 다른 사람, 이렇게 대하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어렵더라고요. 나도 미성숙하다 보니까 그들이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게 불편함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어요. 혹자는 지역주민들하고 친해지려면 같이 술을 마셔야 한다고도 했는데 저는 또 그런 생각은 아니었거든요. 기본적으로 겸손해야 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하고 이런 정도로는 알고 몸에 밴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벽을 깨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아무튼 지역사회개발사업을 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관계형성에 대한 경험이 내가 부족하고, 지식이 아닌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미국에서의 연수 경험에 대해 들어보기 전에 함께 일하셨을 외국인 상사분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데요. 당시 외국인 지부장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그분과 일했던 경험은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당시 한국 지부장님은 좋은 쪽으로 특이하신 분이었어요. 지역개발 현장 경험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하셔서 이론에도 탁월한 지식인이었고, 60대의 싱글이셨어요. 아시아 지역 디렉터로서 한국 지부장을 하신 분이라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신 분이었어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파악도 잘하셨어요. 이분이 한국이 너무 좋아서 한국으로 귀화를 하셨어요.
당시 지부장님은 주로 어떤 일을 담당 하셨나요?
이 분이 한국 직원들을 훈련하면 한국인 직원들이 지역에 나가서 활동을 했어요. 이분이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건 아니었고, 현지 직원인 한국인 직원들이 지역에 가서 주민들과 같이 사업 계획을 세웠어요. 지역사회 욕구는 지역사회 본인들이 제일 잘 아니까요. 사업계획을 한 후에는 지역사회에서 자갈이나 흙 같은 지역에서 자체 조달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말해요. 그다음 기술자 인건비와 같이 지역에서 조달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지원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지부장님은 재정적으로 역량이 있는 기업들의 총수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셨어요. 그분들을 좋은 식당에 다 초청해서 우리 사업을 소개하고 지역사회가 요청한 자원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셨어요.
하나의 프로젝트에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했던 거죠. 지역사회는 본인들이 할 수 있는 몫을 최대한 생각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우리 기관에게 요청하고, 그러면 우리 지부장님은 지역사회가 요청한 자원을 모금하는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기금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자금이 모아지는 이 과정과 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했던 거예요.
인터내셔널 본부와 한국 지부의 관계는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인터내셔널 본부인 미국에서 담당 직원들이 한국 지부로 한국 사업을 모니터링하고 평가하러 출장을 오고는 했어요. 당시에 반기 보고서를 본부로 제출했는데 재정 관리, 후원자 관리, 결과 보고 등이 깔끔하니까 한국 지부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높았어요. 우리도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고요.
다시 미국 연수 프로그램으로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미국에서 받은 교육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84년에 미국에서 진행하는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어요. 4개월 과정과 11개월 과정이 있었는데, 저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으니까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 4개월짜리로 지원을 했죠. 대부분 입양기관 같은 곳으로 파견이 됐는데, 저는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활동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미국의 굉장히 유명한 교회로 파견이 된 거예요. 교회에서 내가 뭘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까 미국은 교회가 커뮤니티 지원 사업을 많이 하더라고요. 제가 목사님 댁에서 한 달 동안 홈스테이를 했었는데, 아침마다 스텝 미팅을 하고, 목사님들도 상담 담당, 음악 담당 이런 식으로 각자 역할을 가지고 아웃리치 활동을 하시더라고요. 설교만 하는 게 아니라 꼭 사업 활동을 하는 것처럼요. 그때 그 교회에서 사업개발과 계획에 대한 과정도 배우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도 경험했어요. 음악회 같은 것들을 통해서 모금을 어떻게 하는 지도 봤고요. 무엇보다 위기 여성 그룹과 만나서 그룹 상담하는 과정을 보고 배우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돌아오게 됐죠.
[참고] 미국 국무성 주관 국제연수 프로그램 Council of the International Program (CIP): 해외의 사회개발사업 활동가(사회복지사, 청소년지도자 등)를 초청하여 미국의 사회복지기관이나 시설에서 미국 활동가들과 상호교류하며 학습할 수 있는 연수 프로그램. 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미국 관계 재건을 위해 1950년대에 독일 청년 대상 리더십 훈련을 실시한 것이 시초이며, 현재까지 미국내외에서 진행되고 있다.
선배님께서 느끼기에 연수 후 한국으로 돌아오신 뒤, 업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하던 일을 조금 더 잘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미국에서 장애인들이 지역에서 기부받은 청바지나 재킷 같은 옷을 세탁해서 팔더라고요. 우리 농촌 여성들과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생겨서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그 사업을 했죠. 먼저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필요 없는 옷가지를 모았어요. 그걸 우리 사업 지역인 농촌으로 전달하면 부녀자들이 모여서 빨래도 하고, 떨어진 단추도 다시 달고, 고칠 거 고치고 그랬어요. 우리 사업 지역이 아주 산속에 있어가지고 시장까지 가려면 그야말로 한나절이 걸려서 생필품이 굉장히 필요한 곳이었는데, 우리 사업을 통해서 시장에 가서 물건을 팔기도 하고 사기도 수월해진 거예요. 그때 농촌에서 사는 여성들도 자신들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고,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때는 제가 현장에 가면 굉장히 반가워하고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지내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사업이 정말 잘 되었고, 모델화 되어서 또 다른 지역으로 또 전파되고 그랬어요.
저희가 지금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하면서 주민위원회나 지역 대표분들과 협력할 때가 많은데요. 당시 한국에서 이장님들이나 지역 공무원분과 함께 일하신 경험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저희 기관 사업은 마을의 지역개발위원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변화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이분들이 직접 위원장을 뽑고 리더가 생긴 거예요. 지역개발위원회에는 주민들 뿐만 아니라 면장 같은 공무원들도 당연직으로 들어갔어요. 사실 면장이 해야 할 일인데 자원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가 우리 기관의 지원을 통해서 길도 닦고, 다리도 놓고 하니 적극적이었죠. 그리고 우리가 면장 같은 공무원분들을 참 존중했어요. 그래서 마찰이 생겼던 적은 거의 없고 항상 개발위원회 위원장과 면장이 같이 협력하고 그랬어요. 프로젝트 제안서를 가지고 군청에 갈 때도 같이 가는 거죠. 면장 그리고 개발위원회를 중심으로 부녀회, 청년회, 노인회 이렇게 다 세부 위원회들이 전부 있으니까 지역이 하나가 되기 굉장히 수월했어요.
선배님께서는 당시 NGO활동가의 역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셨나요?
누가 누구를 돕고 그런 개념이 아니라 마을이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해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의 사회사업과는 조금 다른 지역개발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이에요. 축산, 농업, 경제 등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이 같이 일했어요. “여기는 여러분들의 마을이고, 이곳을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여러분들 권리이고 의무입니다” 이런 말들을 주민들에게 많이 했어요.
그냥 인간은 똑같은 존엄한 존재이고,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는데 이것을 충분히 못 누리니까 저희가 전문성을 살려 지역개발을 지원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희 사업의 참여자들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오지 농촌에 태어났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게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이들이 받을 때도 당당하게 받고, 우리가 줄 때도 이게 당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니 함께 고민하고 행동하자는 것이었죠.
한국이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해외로부터의 지원이 종결되고 이후에는 우리가 모금국으로서 또 다른 국가에 자원을 연결하는 역할로 전환하게 되었는데요. 그 과정을 직접 겪으신 분으로서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 당시에 코리아나이즈, 한국화 된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한국의 경제가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 지부가 경제적으로나 다른 면으로나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본 거죠.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지부에서 한국화가 되면 이사회도 구성하여 이사들을 새로 모셔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이사를 할 수 있을까 이런 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어려웠어요. 건물이 있었던 타 재단들은 한국화 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지역을 개발할 때 그들 스스로 일어서도록 충분히 지원한 후 그들이 지속가능한 역량을 갖추면 그 지역을 떠나죠. Phase-out이라고 하지요. 조직이 경제적으로 한국화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후원이 끊어지기 시작하니까 그 과정이 어려웠던 거죠. 우리 직원들이 나보고 우리 내일 간판 내릴지도 몰라요, 맨날 이런 소리를 했어요. 근데 저는 절대로 간판 못 내린다, 그랬어요. 이 단체가 1919년에 아동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정신으로 만들어져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거예요. 비현실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옳은 일이고 올바르게 앞만 보고 가면 간판은 안 내리게 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어요.
현지화, 로컬라이제이션, 독립과 같은 주제는 지금도 여전히 국제개발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는데요. 선배님께서는 현지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최근에 현지화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데 우려되는 점도 있어요. 그간 사업을 수행했던 국가에서 현지화, Phase out을 논의할 때, 잘 준비하지 않으면 그동안 재정적으로 인적으로 투입했던 많은 것들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도 있죠.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신뢰를 기반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배님께서 엮으신 저서 ‘꼭 가야겠어요?’의 제목을 곱씹어보게 되더라고요.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하면 이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을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일을 마주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있거든요. 선배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국제개발협력, 특히 NGO에서 일하는 선생님들이 참 대견스럽고 기특해요. NGO에서 일하는 사람은 남들과는 다른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데 돈은 필요하죠. 그렇지만 NGO에서 일하는 사람은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생각해 보세요. 일반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월급도 점점 많아지고, 회사에서 많은 복지를 제공하죠. 일반회사와 비교했을 때 우리는 적은 급여를 받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덜 누릴 수도 있어요. 남들과는 다른 가치를 끝까지 고수할 수 있는 남다른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이야기를 정말 오랜만에 하는 것 같네요. (웃음)
지금 이 길을 꼭 가야만 하는, 가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담이지만 여러분 팀 명을 듣고 맨 처음에 웃었어요. 제가 사회복지관 관장으로 가게 되었을 때, 구청장님이 만날 때마다 ‘좋은 일 하십니다.’ 그러시는 거예요. 너무 많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진짜 ‘좋은 일 하십니다.’ 그 말이 그렇게 듣기가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좋고 즐거워서 하는 일인데 그 말을 듣는 게 양심에 찔리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들도 다 똑같이 좋은 일 하는데 왜 나보고 자꾸 그런 얘기를 하냐 이거예요. 내가 그 얘기 참 싫었거든요. 그런데 좋은 일 아닌 일이 어디 있겠냐는 생각을 하면서 요샌 그냥 웃어요.
일을 하면서 조금 많은 것들이 불편해도 내가 하는 일이 좋고 보람을 느낀다면 그건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며 일하면 좋겠어요. 저는 아동인권 교육 훈련을 하고 있어요.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제가 받은 소명이라 생각하며 일하고 있죠. 이런 마음을 하나씩 갖고 일하면 그래도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력]
1965년 이화여대 불어불문학사 졸
1978년 이화여대 영어교육석사 졸
2003년 미국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사회복지학석사 졸
2011년 – 현재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 / (2012 – 현재) 아동인권교육훈련연구소 소장
2012년 – 2016년 서울특별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위원회 위원/부위원장
2005년 – 2016 유엔아동권리협약한국NPO연대 사무국장
1980년 – 2009년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부회장 퇴임)
1978년 – 1980년 미국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지부 사업조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