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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 일 하시네요 Nov 20. 2023

중간자들: 이배근,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우리의 ‘오래된 현재‘ 국제개발협력 선배와의 인터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전신인 CCF(Christian Children’s Fund)에서 일을 시작해 24년간 몸 담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어떤 계기로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또 입사 과정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공무원으로 처음 일을 시작했어요. 시청에 다니고 있을 때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까만 세단 차 한 대가 딱 서더니 우리 대학교 총장님이 문을 열고 제 이름을 부르시더라고요. 아마도 제가 학생회장을 해서 제 이름을 아셨던 것 같아요. 총장님이 “이군, 지금 뭘 하는가” 하시는데 제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을 못 했어요. 그때는 공무원이라는 게 지금과는 달랐어요. 그러니까 그분이 눈치를 채시고 다음 날 총장실로 오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가봤더니 당시 CCF에서 근무하시던 분이 계셨고, CCF에 대한 얘기를 하시면서 “너 잘 됐다. 내가 있는 곳 참 좋다. 외국 원조기관인데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는 가정에 매월 일정액의 후원금을 통해서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생활비도 지원할 수 있는 곳인데 네 성격에 잘 맞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CCF로 가게 된 거예요.  

근데 나는 총장님이 얘기를 하면 그냥 되는 줄 알았는데 첫날 가니까 아무도 없고 나 하나만 영어로 시험을 보는 거였어요. 복지부장이라고 하는 분이 오시더니 소설책을 하나 던져주면서 실력껏 다 해서 이걸 영어로 번역을 하라 이거예요. 그 책상에 나만 혼자 앉아서. 지금도 기억나는데 ‘후원자’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걸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분이 책상 앞에 영한사전 한영사전을 하나씩 딱 놓고 갔는데 그걸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근데 내가 그 생각을 했어요. 이게 내 평소 실력을 보려고 하는 거지 사전을 보고 하라는 뜻은 아닐 거다. 그래서 내가 그걸 안 보고 후원자를 sponsor가 아닌 candidate라고 말도 안 되게 번역을 했어요. 그랬는데도 영어를 얼마나 잘하느냐 보다도 어떤 양심이라든지 그런 걸 보셨는지 시험을 통과한 거죠.


입사 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에 들어가면 16개 시도 중 하나로 가야 했어요. 왜 그러냐면 그때만 해도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서울에만 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입사 후 처음 6개월 이상은 지역에서 근무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직원배치를 맡으신 복지부장님이 전주, 순천, 강릉지부 중에 어디를 택하겠느냐라고 물으셔서 얼른 전주를 가겠다고 했어요. 세 곳 모두 잘 모르는 곳이긴 하지만 제가 전주 이 씨거든요.  

전주에 가니까 전주시에서 전주 보건소 근처에 사무실을 줬어요. 아동 한 명당 결연후원금이 보통 10달러 정도 됐었는데, 6-70년대에 10달러면 중학교 학생의 1년 수업료거든요. 그러니까 시에서 대환영을 했죠. 전주에는 CCF에서 운영하는 시설도 있었는데 저는 시설 관리는 아니고 결연 아동 가정을 매달 방문해서 케이스 관리하고 기록도 하고 후원자 편지도 써오고 했어요. 내가 그때 신참이라 그랬는지 183 케이스를 주더라고요. 그때는 자전거를 타고 다닌 시절이에요. 전주도 내가 처음 가서 지리도 잘 몰랐지만 개골을 건너면서 매일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방문해서 후원자에게 보내는 첫 인사편지를 받기도 하고 가정상담도 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어요.


어떤 점에서 특히 좋으셨어요?

결연 가정들은 수입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한 가정은 그 아이가 5학년인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다른 수입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근데 매달 결연 후원금을 받게 되니까 내가 가정방문을 해서 어디에 쓰는지 여쭤보면 애들을 위해서 다 너무 잘 쓰시더라고. 어머니도 그 학생도 고마워하는 눈빛이 기억에 남아서 더 열심히 했죠. 가정방문 하면서 어떻게 아동을 잘 기르고 해야 하는지 부모교육도 하고 했는데 그런 일도 참 보람이 있었죠.                          



점심도 거른 채 수십 리 되는 들과 산길을 헤맬 때면, 업무에 지친 나머지 ‘우리가 무슨 편지배달부냐’ 고 우리끼리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있지만, 보람은 비길 데 없이 큰 일이었다.

[한국어린이재단, CCF 38년사: 사랑은 국경을 넘어: 1948 – 1986 (p.305)]



케이스 관리 외에 또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전주에 가 있는 동안에 케이스 관리 외에도 번역 서류가 등기로 오면 번역해서 또 서울로 등기로 보내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얼마 후에 서울에서 선배가 내려오시더니 좀 잘하는 사람들은 서울로 올리려고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나름 특혜를 받아서 금방 서울로 가게 됐죠.  

서울에서 초기에는 영어 번역부라고 해서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해외에서 한국 아동들을 1대 1로 결연하는 후원자에게 우리 아이들이 쓴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어요. 반대로 후원자 편지를 한글로도 번역했고요. 그때는 컴퓨터도 아니고 타자기로 타이프를 해야 했는데, 하루에 40장 넘게 번역하고 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 해외 원조기관, 혹은 INGO라는 일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는 어땠었나요? 외국계 기업 같은 느낌으로 인식되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50년 동안 평생을 제가 이 길을 가고 있지만 사실 저는 보수에 대해서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공무원으로 있다가 CCF로 갈 때에도, 후에 유니세프로 이직하고 또 세이브더칠드런 회장으로 갈 때에도 한 번도 월급이 얼마인지는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당시 처우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서울시 공무원 월급의 3배였고, 달러로 지급됐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가 어려운 때니까 환율이 1년 내에도 여러 번 오르고 그랬죠.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고 생각이 돼요.


외국 기관이었던 만큼 근무 환경이나 문화도 한국의 다른 조직과 달랐을 것 같은데요.

당시에 기관명이 재한 기독교 아동복리회, 그러니까 Christian Children’s Fund in Korea 그랬거든. 내가 들어갔을 때는 회장님이 미국 분이고 부회장님이 영국 분이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영어를 많이 썼고, 직원은 한 30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지금 서소문에 중앙일보사가 주차장으로 쓰는 건물이 있는데 거기에 우리 사무실이 있었어요. 당시에 내가 근무할 때는 서울시에서 최고로 좋은 사무실이었어요. 그때가 69년도 70년도쯤인데 출근할 때 카드를 찍었어요. 그때만 해도 그런 게 별로 없고 다들 도장 찍고 그랬거든요. 근데 우리는 외국식으로 출근부를 카드로 탁탁하니까 1분만 늦어도 빨간 불이 켜지고 그러니까 거짓말도 못하고 생활 습관이 됐죠(웃음). 그리고 다른 회사랑 다르게 8시 반에 30분 먼저 출근하고 5시에 끝났어요. 그것도 외국식이죠. 그 30분이 뭐냐 하면 오전에 15분, 오후에 점심 먹고 15분 브레이크 타임이 있었어요. 그것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30분 빼고 8시간 근무였던 거죠.


지금 저희들은 사업국가로 모니터링이나 평가 출장을 가고는 하는데요. 당시에 미국 본부에서 한국으로 와서 평가를 했었나요?

연례보고 평가(Annual Report Evaluation) 제도가 있었어요. 매년 한 번씩 시설을 평가를 해야 돼요. 우리가 평가 항목에 맞게 시설마다 평가를 해가지고 미국에 보냈어야 돼요. 그전에는 그런 체계적인 평가가 없었죠. 미국 본부 직원들이 직접 한국으로 와서 모니터링하고 평가도 했어요. 아주 잘했어요. 우리가 그런 일을 왜 했는가 같이 논의하고 그분들이 코치를 하기도 하고. 그럼 우리는 학생처럼 잘 받아들이곤 했어요. 개선사항을 서로 논의하고 다음 해에 와서 어떻게 바뀌었나를 보기도 했죠. 어린이집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미국에서 잘 된 사례를 운영하신 분들을 우리나라로 파견 보내서 강의를 듣기도 하고 그랬어요.

또, 당시만 해도 미국 CCF가 50개국이 넘는 여러 국가를 지원했는데 해마다 연례회의를 하면 각 국가 직원들도 참석을 했어요. 필리핀에서 다 모여, 하면 거기로 가는 거죠. 태국, 대만에도 가고 그랬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우리나라 프로그램을 발표 하고 다른 나라 직원들하고도 친해지고 교류하면서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도 얻고 많이 배웠어요.                         



시설평가의 방법은 그간 많은 변화를 거듭했으나 본격적인 평가는 CCF로부터 연례종합평가서가 시달된 이후였다. 이 시설 평가의 기초가 된 것은 1975년 12월에 발간된 ‘개발도상국 아동보육시설 최저기준'이었다. 평가 기준으로는 타당도, 신뢰도, 객관성, 유용성을 중시했다.

[한국어린이재단, CCF 38년사: 사랑은 국경을 넘어: 1948 – 1986 (p.117)]



미국으로 연수도 다녀오셨다고 들었어요.

미 국무성에서 사회복지 및 청소년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각 나라별 2명씩 선발해서 1년 반 동안 유학비를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회장님 주재 부장회의에서 회장님께서 재단의 명예도 있으니까 이부장이 한 번 가보라고 하셔서 기관 내 76명의 응시자들 중에 운 좋게 1등으로 뽑혀서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지요.  


그러니까 총재님이 당신 말이 맞다,
우리 한 번 시설이 아니라 가정에서 기르는 거 해보자, 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지원을 결정했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제일 극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잖아요? 바로 한국으로 전보 쳤죠.



미국 본부의 담당 직원이 한국으로 출장을 왔던 것처럼 선배님께서도 미국 본부로 출장을 가기도 하셨을 것 같은데요. 혹시 기억나는 일화가 있으신가요?

80년대 초반에 서울시에서 소년소녀가장 지원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정부에는 예산이 없으니까 6개월 정도만 우리 예산으로 사업을 하면 이후에는 정부에서 지원을 해준다는 거예요. 그때 필요한 돈이 7,500만 원이었어요. 큰돈이었죠. 근데 우리 회장님도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그래서 CCF 미국 본부에다가 사업 계획서를 써가지고 가서 예산을 타와야만 했죠. 엄청 급하게 공항에 2시간 전에 겨우 도착해 가지고 미국 본부에 갔어요. 근데 한국에서 거기까지 갔는데 총재님이 너무 바쁘다고 시간이 5분밖에 안된대요. 아무튼 어렵게 총재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절 보자마자 한국은 연고자가 있는데도 왜 아이들이 고아원으로 보내지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저는 소년소녀가장 사업 설명하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러 온 건데 갑자기 고아원에 대해서 물으신 거죠. 근데 저는 이거다, 마침 잘됐다 생각하고 상황 설명을 했어요.

“총재님 말씀대로 한국에서는 부모 중 한쪽이든 친척이든 연고자가 있는 아이들이 도무지 거기서 기를 수 없는 사정에 의해서 시설로 보내집니다. 그런데 저희가 그런 아이들을 바로 보육원 시설로 보내지 않고 우선 가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고 합니다. 한국에는 소년소녀가장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금 정부에서 소년소녀가장이라는 걸 법적으로 만들고 지역사회와 함께 이 아이들을 지원하려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는데 재원이 없습니다. 서울시에서 하는 얘기가 한 6개월 동안만 우리가 버텨주면 후에 예산을 준다고 합니다. 7,500만 원 정도 예산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총재님이 당신 말이 맞다, 우리 한 번 시설이 아니라 가정에서 기르는 거 해보자, 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지원을 결정했어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제일 극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잖아요? 바로 한국으로 전보 쳤죠. (웃음)


그렇다고 해도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 회장님을 포함한 모든 직원이 막막했어요.
그런데 얼른 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걱정하지 마시라고. 감소하는 10% 만큼 우리가 채우면 된다고요.
10% 없어지는 건 우리가 국내 개발하겠다고 그랬어요. 그때가 지금도 생생해요.  



이후에 미국의 지원 종결과 기관의 홀로서기 과정을 경험하셨는데요, 당시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1976년도에 미국 리치먼드 본부의 복지국장이 한국에 왔어요. 그분이 오면 내가 전국에 있는 우리 사업장을 같이 다니면서 통역도 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딱 이래요. 한국도 이제 잘 살게 되었으니까 10년 지원 감소 계획을 시행하겠다는 거예요. 당장 이듬해인 77년도에 10% 감소하고 다음 해 10% 감소시켜서 최종적으로 1986년도에는 미국의 지원이 제로가 되어버리는 거죠. 근데 사실 그런 데가 없어요. 그냥 지원을 뚝 끊어버리지. 그런데 CCF는 우리가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 감소 계획을 세워준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우리 회장님을 포함한 모든 직원이 막막했어요. 그런데 얼른 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걱정하지 마시라고. 감소하는 10% 만큼 우리가 채우면 된다고요. 10% 없어지는 건 우리가 국내 개발하겠다고 그랬어요. 그때가 지금도 생생해요.  


생각만 해도 당시의 막막함이 짐작이 됩니다. 실제로 국내 후원자 개발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11월 넷째 주 추수감사절 즈음에 교회에서 청년 셋이 찾아왔어요. 고아원에 떡을 해가지고 간다고 그래요. 일단 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우리 재단에 와서 지원해 주는 걸 참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근데 혹시 이렇게 할 수는 없겠느냐 그랬어요. 48년도에 처음 미국이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 단체를 통해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돕는 일을 했는데, 이제 우리도 어느 정도 잘 살게 됐고 앞으로 외국에서 원조가 끊어질 테니까 국내 정기 후원자를 개발해 보자고 먼저 제안했어요.

당시 우리나라 고아원 시설 아동들은 굉장히 어려웠지만 추석이랑 설이면 배가 터진다 그랬어요.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나라 후원자들이 떡을 해와서 그냥 가는 게 아니고 애들이 먹는 걸 보고 가요. 아이들이 일 년 내내 배가 고프다가 딱 이틀만 배가 터지는 거죠. 그런데 한 번에 줄 이 떡을 조금씩 나누어서 매달 아이에게 후원을 하면 그 아이들이 학교도 가고 지속적으로 지원을 받으니까 아이들에게 더 좋을 것 같고, 이렇게 하는게 한국에서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설득해서 그분들이 우리 단체 최초의 정기후원자가 된 거예요.  


93년부터는 유니세프에서 사업 조정관으로도 일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유니세프에서의 경험이나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93년에 유니세프가 한국에 대한 원조를 공식적으로 종결했어요. 우리나라가 이제 유니세프 지부가 아니라 독립적인 국가 위원회가 되는 거였죠. 지원이 한 순간에 종결이 되면서 직원들 월급이 부족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워졌고, 자원 개발에 최선을 다하게 됐어요. 이때 아시아나 항공과 비행기 안에서 유니세프를 후원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이게 히트를 쳤어요. 근데 그 동전이 얼마나 무거워요. 그래도 그때는 참 젊었죠. 공항에 가서 그 봉투를 다 열어가지고 지폐든 동전이든 직접 수거해 오는 거예요. 아주 막 신났죠. (웃음)

 

지원 종결 후 독립으로 이어지는 전환기에 자체적인 재원 마련이 가장 시급하고도 핵심적인 과제였던 것으로 이해되는데요. 당시에 모금 외에 또 어떤 논의들이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앞에서 말했던 소년소녀가장 사업 예산이 이후에 서울시에서 나왔고, 몇 년 뒤부터는 전국적으로 확대가 됐어요. 정부에서 예산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리치먼드 본부에서도 우리나라는 자립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거죠.

85년도에는 76년도에 수립했던 10개년 재원 감소 계획이 그대로 진행이 되어서 모든 예산이 끊어졌어요. 86년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지원 종결이 된 거고요. 85년도에 내년이면 완전히 지원이 없어지는 상황에서 76여명의 전 직원이 모여서 워크숍을 했어요. 우리가 뭘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기관의 앞날을 결정할 논의를 거듭한 끝에 한국적 사회복지관 모형 개발을 통한 복지관 사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의견을 모았어요. 아동, 가정, 지역사회를 삼각의 꼭지점으로 연결하는 모델에 여섯 개의 기본 사업 영역을 도출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기둥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자원개발이에요. 한쪽 기둥에도 내벽과 외벽이 있다고 하면 한 면은 정부 예산 등 공적 기금 개발이고, 다른 한 면은 시민들로부터 후원 개발을 하는 거죠. 또 다른 기둥은 우리 직원들 76명이었어요. 그러나 장래에는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일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다 함께 그림을 그렸죠. 여기에 우리의 미래, 그리고 우리 아동의 미래가 여기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10개년 장단기 계획을 추진하기로 했어요.                        


오늘날 CCF한국지부보다 더 내용이 충실하거나 자주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지부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아동복리회의 놀라운 성공을 바탕으로 CCF는 그 철수를 결정한 것입니다.

[CCF 총재 밀. 한국어린이재단, CCF 38년사: 사랑은 국경을 넘어: 1948 – 1986 (p.11)]



CCF가 우리보다 못한 후진국의 불우아동을 돕기 위해 10년 전부터 연차적으로 지원을 감소시켜 실질적 관계가 끊어지고 보니 가장 믿고 의지했던 부모 형제나 친구를 잃은 것 같은 심정입니다. 섭섭한 마음과 막연한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즈음에 38년에 다사다난했던 애환의 역사를 수록한 이 책이 우리의 반려자로서 좌표와 진로를 설정해 주며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해 주게 된 것은 뜻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CCF 시설연합회장. 한국어린이재단, CCF 38년사: 사랑은 국경을 넘어: 1948 – 1986 (p.23)]



앞서 가는 사람이 제대로 걸어야 다음에 오는 사람들이
그 발자국을 따라서 간다고요.



‘외원단체’에서 시작해 지원 종결과 전환의 과정에서 겪으신 경험담을 생생하게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선배님께서 일하셨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지만, 현재 시점에서 NGO에서 일하고 있는 저희들에게 혹시 해주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후배들이 참 자랑스럽죠. 그때는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상황이 쉽지 않았어요. 지금 보면 (조직이 성장한 게) 진짜 대단한 거예요. 퇴계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앞서 가는 사람이 제대로 걸어야 다음에 오는 사람들이 그 발자국을 따라서 간다고요. 저도 그랬고, 지금도 각자 어려움은 있을 수 있겠지만, 뒤에서 보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혼자 생각하지 말고 팀워크를 잘 다져 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이 직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거거든요. 저는 한 직장에 24년 있었지만 더 있는 분들도 계시죠. 그러면 이 직장이 내 생애인거죠. 내 생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일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해요.




 


[약력]

1969년 연세대학교 신학과 졸

2003년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 대학원(박사) 졸업


2003년 – 현재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 회장

2007년 –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

2005 – 2008년 국무총리실 아동정책조정위원, 여성가족부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원장

1998 – 2005년 Save the Children 회장

1993년 – 1998년 UNICEF 조정관

1969년 – 1993년 어린이재단 (복지부장, 미아찾기종합센터 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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