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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 일 하시네요 Nov 27. 2023

우리의 '오래된 현재' 국제개발협력 선배와의 만남

중간자들: 나오며



나오며


하나의 국제개발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참여하고, 이들이 주고받는 상호작용에 의해 프로젝트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생명력을 갖습니다. 개발 프로젝트의 실행이란 제안서에 명시된 일련의 활동을 현장에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에 의해 “지속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협상되는 과정”인 것입니다(Long & Long, 1992). 그러나, 우리 자신을 포함한 NGO 실무자는 사업을 관리하기 위한 ‘인력 구성’ 표 안의 존재로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유사하게, 사업 ‘수혜자’의 동기와 이해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납작한 존재로 묘사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부 경우 현지직원을 사업 실행을 위한 기능적 존재나 ‘역량 강화’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합니다. 때때로 프로젝트는 ‘개입 모델’의 효과성 보다 그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역동을 만들어내는지에 더 큰 영향을 받는 만큼, 이번 <중간자들> 인터뷰를 통해 프로젝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현지직원’에 대해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언어와 규범의 번역가


지역의 욕구를 발굴하여 외부 자원과 연결하는 것만큼 중요한 로컬 브로커의 또 다른 임무는 번역가로서의 역할입니다. 이때 번역이란 영어에서 현지어로의 언어적 전환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추구하는 규범, 지식, 관행 등을 현지에서 수용가능한 형태로 해석하고 협상하는 작업을 포함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규범 번역가’ (Berger, 2017), “규범 창업가”(Bierschenk, 2014), 혹은 “지식 중개인” (Merry, 2006)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만난 두 명의 한국인 현지직원들 또한 통번역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해외 후원자와 한국의 결연 아동 사이에 오고 가는 서신과 미국 본부에 보내기 위한 사업 보고서의 한영 번역은 이들이 신입 시절에 담당한 주요 업무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미국 국무성이 주관하는 사회개발사업 활동가 대상 국제 연수 프로그램에 수개월에서 1년 이상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해당 프로그램이 교육한 지역사회개발 사업의 중요한 가치는 ‘비차별’(Non-Discrimination), 포용과 수용(Inclusiveness), 참여(Participation), 잠재력 개발과 역량강화(Empowering) 등으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했던 사회운동에서 비롯된 참여의 개념이 해외 원조 사업의 주요 어젠다로 전파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참고] 1966년과 1973년에 개정된 미국 대외원조법(US Foreign Assistance Act)은 미국 원조의 '수혜자'가 프로젝트의 계획과 실행에 참여하고 개발의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Cornwall, 2006).


한편, 국제사회 규범을 처음 접하고 이를 한국에 전파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도 막중했습니다. 김인숙 소장은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처음 접하고 돌아오던 날 느꼈던 감정과 그날로부터 시작된 여정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귀국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컨퍼런스에 참석한 유일한 한국인으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알리고 전파해야 할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 무거웠던 발걸음은 나의 사명이 되었다.”(김인숙, 「우리 아이들에게도 인권이 있다고요!」 9~10쪽)



협상가로서의 중간자


번역과 통역의 과정에서 중개인들은 현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협상가로서의 역량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배근 회장이 미국 본부에 직접 가서 소년소녀가장 사업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고 돌아온 일화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 실정에 맞는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설득한 예입니다. 당시 미국 본부에서는 한국의 고아원 아동 상당수가 연고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설로 보내지는지, 왜 미국과 같은 가정위탁제도를 시행할 수 없는지 의문을 표했습니다. 이에 이배근 회장은 위탁이나 입양이 제한적인 한국의 실정에 대해 설명하고, 장기적으로 ‘선가정 후시설 보호’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소년소녀가장 결연사업에 대한 필요성을 피력했습니다.


이후에 소년소녀가장 지원사업은 UN아동권리위원회의 지속적인 권고로 가정위탁 형태로 점차적으로 전환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아동을 대규모 인원이 수용되는 고아원 시설로 보내는 것보다는 소년소녀 가장 결연을 통해 가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한 발짝 나아간 모델이었습니다.


[참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구호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지만 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어린이의 수는 계속 증가했습니다. 당시 CCF는 ‘아동은 가정에서’를 모토로 가정 중심의 아동복지사업을 제시했습니다. 시설에 수용된 아동 중 연고자가 있거나 입양, 위탁 등으로 가정으로 복귀시킬 수 있는 아동은 가족의 품 안에서 키우도록 한 것입니다. (출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홈페이지)



양쪽의 신뢰 얻기와 마주침의 현장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브로커의 핵심 역량 중 하나이며, 이는 사업 참여자(지역사회)와 후원자 측 모두와 협력해야 하는 ‘중간자’의 태생적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중개인에게는 양측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고 이들로부터 신뢰할 수 있다는 평판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Knodel, 2021; Décobert, 2022). 두 사람의 인터뷰에는 인터내셔널 본부로부터의 모니터링 및 평가와 관련한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재정 및 사업관리가 우수한 한국 지부에 대한 신뢰가 높았으며, 평가 피드백을 잘 받아들여 개선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또, 입사 시험에서 영어사전이 있었으나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 실력대로 번역을 했다거나, 회계 관리에서 ‘정직’했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중간자로서 투명성이 중요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마주침의 현장’으로서의 농촌마을과 이 상황에서 이들이 경험한 낯선 문화도 눈여겨볼만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 교육을 받았던 이들 ‘현지직원’은 “가방끈이 짧다“며 자신들을 어려워하는 농촌 마을 주민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골 개울물을 건너며 농촌 마을을 누빕니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농촌 실정에 익숙지 않아 당황했던 김인숙소장의 경험담은 우리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생각하기 쉬운 ‘현지인’ 사이의 다양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아울러 사업 현장에서 외국인으로서 내가 가지게 되는 위치성과 미처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선명하게 존재하는 권력 차이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되새기게 됩니다.



지원 종결, 힘들었지만 뿌듯했던 전환 과정


1980년대 후반, 한국의 경제성장 및 ‘자립화’ 바람을 타고 해외로부터의 지원이 종결됩니다. 두 사람은 외원 단체의 한국 지부가 본부로부터 독립하여 한국 법인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조직의 중심에 있었으며, 급격한 예산 감소로 인한 어려움을 언급했습니다. CCF 가 발간한 사사(社史)에는 종결계획에 따라 후원금이 순차적으로 감소했음에도 막상 지원이 끝나는 순간에는 재정적으로 막막하고 정서적으로 “부모 형제나 친구를 잃은 것 같”이 섭섭했던 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새로운 법인의 이사회를 구성하고 중점 사업 분야를 설정하는 등 조직의 기틀을 재정립하는 것 또한 전환기의 중대한 과제였습니다. 김인숙 소장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기관의 미션과 설립이념에 대한 믿음으로 이 시기를 헤쳐나갔으며, 그것이 자신과 조직을 지탱하는 힘이었다고 강조합니다. 현지화, 독립, 출구 전략과 같은 주제가 여전히 뜨거운 오늘날, 이들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대가 주는 사명,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


살아보지 않은 시절을 상상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두 선배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과 이들의 일이 사회에 기여한 바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 그리고 신나게 일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반짝이는 눈빛이었습니다. 이들의 직업관에는 종교적 신념도 한몫을 했지만, 온 국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사회초년생으로 활발히 일했던 1960-70년대의 한국사회는 ‘보릿고개’라 불리는 식량난이 아직 존재하는 한편, ‘잘 살아보세’의 거대한 열망이 움트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5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흘렀고, 한국은 OECD DAC에 가입하며 공여국으로 전환했습니다. 국제개발협력이라는 생소한 분야가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으며 이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개발 프로젝트와 관련한 직무 또한 기능적으로 세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간 두 선배가 말하는 사명과 자부심, 그리고 보람이라는 가치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혹은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반세기도 더 이전의 경험을 오늘의 우리에게 비춰보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이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던 한국은 세계에서 아이가 가장 적게 태어나는 나라가 될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 이미 성장 없는 사회의 무력감을 경험한 우리 세대가 나와 조직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시대가 주는 사명을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국제개발협력 NGO 활동가에게 ‘가치라는 가치’를 빼놓고 어떤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지 물음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국제개발의 유행은 계속해서 변하고, 철마다 새로운 줄임말과 ‘업계 용어’가 탄생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가치와 보람은 철 지난 것, 혹은 ‘프로페셔널리즘’과 상반되는 의미로 여겨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도 유효한 가치, 국제개발의 다른 행위자와 NGO 활동가를 구별하는 본질은 무엇일까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회상할까요. 지금, 그리고 훗날에도 우리의 눈이 반짝일 수 있기를, 그게 무엇이 됐든 나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중간자들> 시리즈를 마칩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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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ger, T. (2017). Linked in translation: international donors and local fieldworkers as translators of global norms. Third World Thematics: A TWQ Journal, 2(5), 606–620.

Bierschenk, T., Jean-Pierre Chauveau, & Olivier, J.-P. (2002). Local development brokers in Africa. The rise of a new social category. Working Paper No. 13. Department of Anthropology and African Studies. Johannes Gutenberg University.

Bierschenk, T. (2014). From the Anthropology of Development to the Anthropology of Global Social Engineering. Zeitschrift Für Ethnologie, 139(1), 73–97.

Cornwall, Andrea. (2006). Historical perspectives on participation in development, Commonwealth & Comparative Politics, 44:1, 62-83,

Décobert, A. (2021). “I am the Bridge”: Brokering Health, Development and Peace in Myanmar’s Kayin State. Asia Pacific Journal of Anthropology, 23(2), 147–165.

Knodel, K. (2021). NGO brokers between local needs and global norms: Trajectories of development actors in Burkina Faso. Cultural Dynamics, 33(4).

Long, N., and A. Long, eds. 1992. Battlefields of knowledge: The interlocking of theory and practice in social research and development. London: Routledge.

Merry, S. E. (2006). Transnational Human Rights and Local Activism: Mapping the Middle. American Anthropologist, 108(1), 38–51.

Oliver De-Sardan, J.P. (2005). Anthropology and Development. Zed Books Ltd.

Wallace T, Bornstein L, Chapman J. 2006. The Aid Chain: Coercion and Commitment in Development NGOs. Rugby, UK: Intermed. Technol.

김인숙, 정병수. (2019). 우리 아이들에게도 인권이 있다고요! 국민북스

한국어린이재단. (1987). CCF 38년사. 사랑은 국경을 넘어: 1948-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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