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

현의 부름

by 김승예

여느 학교 동아리들이 그러하듯, 학기 초의 열기는 초여름에 접어들며 서서히 식어갔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아무도 공부 안 해’라는 말을 믿고 안심했던 아이들은 상대 평가로 매겨진 성적표를 받아 들고서야, 그 말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로 교실에는 기말고사만큼은 반드시 만회해야 한다는 긴장이 깔렸고, 그 긴장은 동아리 활동이라는 명분을 점점 잠식해갔다.

대부분의 동아리는 이름만 남긴 채, 속은 친목회나 자습실로 변해갔다.
고3 선배들은 이미 내신 성적으로 목표 점수를 맞춘 몇몇을 제외하고는 동아리실에서 자취를 감췄고, 담당 교사들 역시 해마다 갱신되는 입시 실적 앞에서 그 부재를 모른 척했다.


누벨바그도 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부원들은 다른 동아리들처럼 당분간 자습으로 전환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남들은 책을 펴는데 자신들만 영화나 보고 있을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현은 영화를 볼 사람은 보고, 자습할 사람은 자습하는 방식은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소음이 방해된다는 이유로 곧바로 묵살되었다. 결국 감상은 잠정 중단되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다른 선택지가 없어 들어온 동아리였다. 그런데 어느새 유정은, 매주 수요일을 기준으로 일주일을 나누고 있었다.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인물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고, 교탁 앞에 선 현을 훔쳐보는 그 시간이 유정에게는 드문 휴식이자 숨구멍이었다.
그 모든 시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끊겨버렸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요일은 더 이상 오지 않는 날이 되었다.
기다릴 수도, 지나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시간.

유정은 이제 교탁 앞에서 DVD를 재생하는 현 대신, 책상에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문제집을 붙들고 있는 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초여름의 비는 창문을 두드리며 끈질기게 늘어졌다.
강의실 안은 습기와 냉기가 뒤섞여, 피부 위에 얇은 막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먼지가 천천히 떠다니는 동안, 사람들은 각자의 책상에 고개를 묻은 채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유정은 책을 펼쳐두고 있었지만, 문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시선은 어느새 앞자리에 앉은 현에게로 미끄러졌다. 읽던 줄을 놓치고, 다시 돌아가고,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책장은 넘어가지 않았고, 대신 손끝에서 책 모서리만 자꾸 닳아갔다.


현은 문제집 위에 팔을 괴고 있었다.
셔츠는 등을 따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견갑골 아래가 미세하게 솟았다 가라앉았다. 펜을 쥔 손등에는 힘줄이 도드라졌고, 그 손이 이마를 훑을 때마다 유정의 배 안쪽이 함께 당겨졌다.

처음엔 그저 오래 바라본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아니란 걸 알았다.

시선이 그의 등 위에 오래 머무는 동안, 유정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배꼽 아래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그 열은 맥박을 타고 천천히 퍼졌다. 허벅지 안쪽이 이유 없이 조여들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속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정은 다리를 바꿔 꼬았다.
그러나 자세를 바꿀수록 감각은 더 또렷해졌다. 마치 눌러왔던 것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속옷 안쪽이 빠르게 축축해졌다. 미세한 습기가 아니라, 분명한 젖음이었다. 몸이 스스로를 준비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노골적으로 알려왔다.

유정은 숨을 삼켰다.
목구멍이 말라붙었고, 심장이 귀 가까이에서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이 잠시 펜을 내려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어깨가 넓게 펼쳐진 그 자세는, 방어 없이 드러난 신체처럼 보였다. 고요히 오르내리는 등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유정의 머릿속에서 상상이 단숨에 형태를 갖췄다.

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쳐 올리는 장면.
셔츠 사이로 전해질 체온, 숨결이 섞이는 거리, 손이 닿는 순간의 압력.

그 상상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몸이 먼저 받아들였다. 아래쪽에서 움찔하는 수축이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더 많은 습기가 속옷을 적셨다. 허벅지를 조여도, 등을 곧게 펴도 소용이 없었다. 감각은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유정은 책을 덮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종이 모서리가 구겨졌지만,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의식의 대부분은 한 사람에게로 쏠려 있었고, 몸은 그 시선을 배신하지 않고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으려 애썼지만, 다시 현을 바라보는 건 거의 반사에 가까웠다.
엎드린 그의 옆얼굴, 느슨해진 입매, 무방비한 목선.

유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호감도, 동경도 아니었다.
이미 몸이 먼저 답을 내린 상태였고, 마음은 그 사실을 따라잡지 못한 채 뒤늦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유정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형광등 아래 떠다니는 먼지처럼, 자신의 욕망도 이 교실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유정은 해방이라도 된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숨이 한 박자 늦게 따라붙었다. 책과 외투를 급히 챙기며,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시선은 분명 바닥을 향하고 있었지만, 시야의 가장자리에 현의 움직임이 어렴풋이 걸렸다.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 평소라면 일부러 걸음을 늦추며, 그 동작 하나라도 더 눈에 담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유정은 주저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교실 문을 향해 걸었다.
마치 이곳에 조금이라도 더 머문다면, 모든 것이 들통날 것처럼.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렸다.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기색을 품은 채, 분명히 자신을 향해 날아온 소리였다.

“저기.”

유정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의 바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을 걸지는 않을지, 그 가능성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았다. 복도는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이유정…?”

또렷하게 불린 자신의 이름에, 유정은 마침내 체념하듯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토록 아니길 바랐던 얼굴, 현이었다.

유정은 종종 상상하곤 했다.
등굣길이나 하굣길, 혹은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현과 나란히 서서 자연스럽게 말을 나누는 장면을.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자신의 몸이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곧 들려올지도 모를 한마디를 기다리며, 유정은 숨을 죽였다.

“저기… 이거.”

현은 잠시 말을 고르듯 머뭇거리더니, 검은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얼굴이 옅게 붉어져 있었다.

“너 주려고.”

그는 그 말만 남긴 채, 유정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교실 안으로 돌아갔다. 마치 더 말하면 안 될 것이라도 되는 사람같았다.

유정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쥔 봉지의 무게보다, 방금 스쳐간 감정이 더 묵직했다.


화장실로 향한 것은 거의 반사적인 선택이었다. 문을 잠그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확인한 속옷에는 피의 흔적은 없었다. 대신,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정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정리를 했다.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돌리고 나서야 조금 전 받은 봉지가 떠올랐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익숙한 DVD 케이스였다. 현이 매번 동아리 시간마다 들고 다니던 것.
두 여성의 얼굴이 겹쳐진 포스터, 그리고 제목. 잉그마르 베르히만, <페르소나>.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열자, 안쪽에 접힌 종이 하나가 들어 있었다.
공책 모퉁이를 급히 뜯어낸 듯한 거친 흔적, 펜을 쥐는 게 익숙한 듯한 정갈한 필체. 현의 글씨였다.


미안해요. 당황스러웠죠?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요즘 동아리에서 못 보잖아요.
저처럼 아쉬워하는 것 같아서 영화 빌려드려요.
편하게 보고, 다음 동아리 시간에 주세요.
– 김현.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유정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제대로 닿지 않았다. 교실은 물속처럼 멀어졌고, 쪽지의 문장만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하굣길에도 비는 거셌다.
신발 안까지 물이 차올랐지만, 유정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몸은 땅을 딛고 있었지만, 감정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야 젖은 옷과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유정은 결국 윤을 찾아갔다. 복도를 지나,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유난히 낮고, 말도 안 되게 푸르렀다.

윤은 풀 위에 누워, 아무 생각도 없는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정은 그 곁에 나란히 누웠다.

“여기 예쁘다. 밖엔 비만 오는데.”

윤이 웃었다.

“네가 쉴 수 있는 곳이야. 그래서 오늘은 어땠어?”

잠시 망설이던 유정이 입을 열었다.

“현 있잖아.”

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사람.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근데… 나중에, 내가 너무 좋아지면 어떡하지.”

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겁부터 내지 마. 좋아할 수 있을 때, 다 좋아해. 주지 못한 마음이 남는 게, 제일 아픈 거니까.”

초원 위로 바람이 한 번 스쳤다.
유정은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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