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강빈과의 다툼

by 김승예

기말고사가 끝나자, 학교 안의 동아리들은 하나같이 숨을 고르는 쪽을 택했다.
학기 초의 열의는 이미 초여름의 더위 속에서 풀어져 있었고, 한 번 느슨해진 분위기를 다시 조여 붙잡기에는 여름 방학이라는 출구가 너무 가까이 와 있었다. 공부를 핑계로 동아리를 비워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 시기가 되었고, 대부분의 동아리는 이름만 남긴 채 자연스럽게 친목이나 자습으로 변해 갔다. 고3 선배들은 입시라는 현실 앞에서 하나둘 모습을 감췄고, 담당 교사들 역시 그 부재를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그 무기력한 흐름 속에서도 누벨바그만은 묘하게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현은 다시 DVD를 들고 교실로 들어왔고, 그 모습에는 시험이 끝나기를 오래 기다려왔다는 사람 특유의 조용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 다른 동아리들이 흐지부지 흩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영화를 틀었다.

그날 상영한 영화는 <남과 여>였다.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화면을 채우자, 교실 안에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으로 걸어 나가 DVD를 꺼냈다. 두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디스크를 집어 케이스에 옮겨 담으며, 그는 무심한 척 고개를 들어 교실을 훑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뒷자리로 향했다.


유정은 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화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영화가 끝난 지금만큼은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눈가가 옅게 붉어져 있었고, 손등에는 눈물을 닦은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입술은 단단히 다물려 있었는데, 마치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감정을 꾹 눌러 붙잡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현은 그 표정을 보는 순간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안쪽으로 스며드는 걸 느꼈다.
영화를 고를 때마다 막연히 기대했던 반응이 있었고, 유정의 얼굴에는 늘 그 기대보다 조금 더 깊은 무엇이 남아 있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자신이, 어느새 당연해진 것도 함께.


잠시 뒤, 동아리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교실 안의 공기가 풀리듯 느슨해졌다.
현은 가방에서 검은 봉지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짐을 챙기던 유정에게 아무 말 없이 DVD를 건넸다. 유정은 잠깐 머뭇거리다 얼굴을 붉히며 품속에서 다른 케이스를 꺼냈다. 지난주에 빌려주었던 <브로크백 마운틴>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DVD를 맞바꿨다. 손끝이 닿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거리만으로도 충분히 오래 남을 순간이었다.

현은 돌아서는 유정을 붙잡고 싶었다.
여태 본 영화 중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 어떤 장면에서 숨이 막혔는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교실을 빠져나가는 유정의 뒷모습에는 남들의 시선을 철저히 의식하는 긴장이 배어 있었고, 그 기색이 너무 분명해서 현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조금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정이 반납한 DVD 케이스를 열었다.
안쪽에는 작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토끼 캐릭터가 그려진, 어느 여고생의 가방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소품. 평범한 취향이었지만, 그 위에 적힌 문장은 달랐다.


이번 주도 영화 잘 봤어요, 선배.
덕분에 제가 보는 세상이 조금 넓어진 기분이에요.
모든 사람이 세상의 틀에 갇히지 않고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유정


현은 한동안 그 문장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글자를 읽고 있다기보다는, 유정이 조심스럽게 건네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메모를 접어 다시 케이스 안에 넣고, 오래전에 보아 흐릿해졌던 영화의 장면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장면들이 하나둘 선명해질수록, 그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과 유정이 느꼈을 감정이 자연스럽게 겹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겹침은 생각보다 깊었고, 오래 마음에 남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무심코 얹힌 손의 온기가 어깨를 눌렀다. 강빈이었다. 몸을 기울여 현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늘 하던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던졌다.

“오, 뭐래?”

현은 반사적으로 DVD 케이스를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강빈이 유정과 자신이 DVD를 주고받는 장면을 보았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설령 알게 된다 해도, 자신이 숨길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다만, 그 사실을 내성적인 유정이 알게 된다면 결코 반기지 않을 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뭐긴 뭐야?”

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강빈의 손이 어깨 위에서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너 지금 나한테 비밀 만드냐? 실망인데, 김현.”

웃음 섞인 말투였지만, 현은 그 말이 귀에 걸렸다. 장난이라는 외피 아래, 묘하게 뒤틀린 감정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현은 숨을 고르고 말을 꺼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는데,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걔도 나도 영화 좋아해서 빌려준 거고. 나도 영화 얘기할 사람 있어서 좋고, 그게 다야.”

설명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강빈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윤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자신의 자리에 유정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를 필요 이상으로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오래 봤지만 네가 그런 애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강빈은 말끝을 늘이며 현을 훑어봤다.

“솔직히 뭐가 좋냐? 머리는 남자애처럼 더벅머리고, 교복도 남자 교복 입고 다니고. 너야 취향 맞는다는 이유로 좋게 보이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좀 음침하지 않냐? 걔가 누구랑 편하게 대화하는 거 본 적 있냐? 친구로서 말하는데, 그런 애들은 조심하는 게 좋아.”

말은 계속 이어졌고, 현은 끼어들지 않았다.
강빈이 타인을 재단하는 방식도, 그 말 속에 섞인 소유욕도 익숙했다. 그가 유정을 어떻게 보든 상관없었다. 자신만 제대로 보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마지막 한마디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그런 애 좋아하는 거 보면, 너 혹시 호모냐?”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탁 끊어졌다.
현은 생각할 틈도 없이 의자를 밀치듯 일어나, 그대로 강빈의 어깨를 세게 밀었다. 교실 안에 다른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도, 누군가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한 박자에 벌어졌다.

체구가 작았던 강빈은 그대로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놀란 얼굴로 현을 올려다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은 잠시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가슴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 채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날 이후, 둘은 사흘 동안 말을 섞지 않았다.
서로가 잘못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먼저 손을 내밀기에는 마음 한켠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넷째 날 밤, 야자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 강빈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 현은 잠시 서성이다가 결국 다가갔다.

“어디 가냐?”

“집 가지. 이 밤에 어딜 가겠냐.”

강빈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현이 먼저 말을 건 순간부터 이미 마음은 풀려 있었다.

“그날, 내가 밀친 거 미안하다.”

현은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강빈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가, 말없이 끄덕였다.

“나도 잘한 거 없어. 맞을 짓 한 거지.”
잠깐의 침묵 끝에 덧붙였다.
“알잖냐. 나 가끔 삐딱해지고,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거. 그동안 네가 많이 참은 거고.”

그 말로, 둘 사이에 남아 있던 긴장이 조금 느슨해졌다.
말없이 나란히 걷다 보니 어느새 강빈의 아파트 단지 앞이었다.

강빈은 그대로 보내기엔 다음 날이 어색해질 것 같아,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걔랑 사귀냐?”

현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사귀긴 뭘 사겨.”

“그럼 뭐가 그렇게 좋냐. 이 친구한테 다 털어놔 봐.”

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유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취향 잘 맞는 것도 좋고… 피부도 뽀얗고. 가만 보면, 예쁘게 생겼어.”

강빈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너 진짜 모르겠다. 근데 사귀지도 않으면서 DVD는 왜 주고받냐?”

“내가 영화 빌려주면, 걔가 감상문처럼 메모 써서 돌려줘.”
현은 덧붙였다.
“이거 동아리 애들한테 말하지 마. 유정이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강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말 안 해도 다 티 나던데. 숨길 거면 좀 치밀하게 하지, 등신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황빛 가로등 아래 가로수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낮게 번졌다.
현은 천천히 걷다가, 가슴 안쪽에서 묘한 해방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막혀 있던 것이 조금 트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유정을 향한 마음이 전보다 더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문득, 별말 아닌 문자를 보내고 싶어졌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집에 돌아가면 무엇을 하는지, 그런 사소한 안부라도.

하지만 시계를 보니 자정까지 삼십 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메시지를 받으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이미 잠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은 몇 번이고 문장을 썼다 지우다, 결국 아무 것도 보내지 못한 채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날 밤, 현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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