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여름 방학

by 김승예

학기 중, 유정은 학교를 오가며 현을 몇 번이고 스치듯 마주쳤다.
복도 끝에서 어깨가 잠깐 겹치거나, 계단을 내려가다 시야 한쪽에 걸리는 옆모습 같은 것들이었다. 그때마다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늦게 뛰었지만, 곧 종소리와 과제, 교과서 페이지에 묻혀 사라졌다.
학교라는 장소는 늘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 속도로 굴러갔고, 유정 역시 그 흐름에 맞춰 생각을 접어 넣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수식과 문장이 머리를 차지했고, 쉬는 시간에는 학생들의 말소리와 웃음이 빈틈을 메웠다.

현을 떠올린다 해도 그것은 늘 가장자리였다. 등굣길의 짧은 공상, 잠들기 전 불 꺼진 방에서의 얕은 상상. 생각은 늘 깊어지기 전에 끊겼고, 유정은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방학이 시작되자, 시간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아무에게도 재촉받지 않는 오전, 길게 늘어진 오후, 해가 기울어도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
학원에 다니지 않는 유정에게 그 시간들은 지나치게 넓었고,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로 압박처럼 느껴졌다.

그 빈자리는 서서히, 그러나 집요하게 현으로 채워졌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물에 잠긴 손을 멈춘 채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도, 책장을 넘기다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되풀이 읽다가도, 유정의 생각은 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금쯤이면 학원에 갔겠지.’
‘저녁은 집에서 먹을까, 밖에서 먹을까.’
그런 질문들이 의미도 목적도 없이 반복되었다.

현의 하루를 상상하는 일은 유정에게 어느새 하루를 버티는 방식이 되어 있었다.
그 생각들 속에서만큼은, 자신이 그의 시간에 아주 조금이나마 겹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정은 문득문득, 현에게서 문자 한 통이 오기를 바랐다. 안부여도 좋고, 아무 의미 없는 말이어도 괜찮았다. 단지 자신을 떠올렸다는 흔적, 그가 자신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불렀다는 증거만 있다면 충분했다.

그러나 휴대전화 화면은 끝내 조용했다.
동아리 면접을 취소한다는 공지 이후로, 현은 아무 말도 보내오지 않았다.

아직 돌려주지 못한 DVD를 핑계로 먼저 연락해 볼까, 유정은 며칠 동안 같은 문장을 머릿속에서 썼다 지웠다.
‘DVD 잘 봤어요.’
‘언제 돌려드리면 될까요.’
하지만 그 문장들은 끝내 손끝까지 내려오지 못했다.

바쁘겠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곧이어 어쩌면 이 침묵 자체가 하나의 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그 무심한 침묵마저 깨뜨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답장이 오지 않을까 두려웠고, 기다리는 자신이 지나치게 초라해 보이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유정은 그렇게, 자기 안에서 점점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저항하지 못한 채 앓듯 견뎠다.


그날 밤, 열대야는 숨이 막힐 만큼 짙었다.
창문을 열어두었지만 바람은 들지 않았고, 공기는 눅진하게 방 안에 눌러앉아 있었다.
유정은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을 맞았다.

전깃줄 너머로 낮아진 달이 창문 틈 사이로 희고 얇은 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유정은 그 빛이 눈에 닿는 것이 싫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빛이 가려지자, 오히려 더위와 답답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숨이 막히는 듯한 공기 속에서 피로와 짜증이 겹겹이 쌓였다.
유정은 이유 없이 화가 났다.
현이 보고 싶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미웠다. 혹시 자신이 무심코 저지른 말 하나, 표정 하나 때문에 현이 실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 마주쳤던 날의 얼굴, DVD를 건네던 순간, 케이스 안에 들어 있던 메모의 문장까지.
유정은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 놓고 닳도록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 모든 불안이 결국 자기 안에서 자라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확인할 수 없는 감정 위에 혼자서만 의미를 덧씌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정은 그 생각들을 애써 접어 머릿속 서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 땀에 젖은 두피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충전기에 꽂아둔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유정은 반사적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흔한 광고 문자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을 보는 순간, 입술이 가늘게 떨려왔다.


‘유정아, 지금쯤이면 자겠지.
혹시 내가 문자해서 깼으면 미안해.
…우리 이번 주 목요일에 만날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가시기만 했던 달빛이 이제는 현의 방에도 내려앉아 그를 이 문장으로 이끌었을 것만 같았다.
유정은 그 빛이 자신과 현을 잇는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느껴졌다.

차가워서 닿으면 부서질 것 같아도, 유정은 그 빛을 아무 말 없이, 오래 끌어안고 싶었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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