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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Apr 21. 2016

어느 노련한 차장의 불안함

[I see you] #1


사실 우리가 여행을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B와의 대화는 늘 시간이 모자랐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내면 어딘가의 문이 열리는 듯했다. 우리는 서로에게만 문을 열고 자신을 보여주었다. 열려있는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타인과는 나누지 못하는 저 너머의 말들을 우리는 자주 쏟아냈다. 그러기에 매번 만남의 시간은 너무 짧았고, 실상 자주 만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온 일상과 영혼까지 탈탈 털어 일에 바쳐야 하는 광고인이었으니까.  


여행을 계획했다. “저는 관광은 딱히 필요 없어요. 가서 대화나 실컷 하시죠.”

오사카와 교토가 적당했다.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저 모든 것을 배경으로 두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곳. 그리고 멀지 않은 곳.


우리는 종일 걸었다.  종종 끼니도 걸렀다. 그저 걸으며 이야기하고 있으면 시간이 도낏자루 썩듯 흘러갔다. 대화의 주제는 많았지만 가장 큰 이슈가 있었다.


B는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니어 시절부터 내내 바라던 회사였다. 그것이 문제였다. 이미 차장이 된 그녀에게 회사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을 터였다. 회사가‘차장’을 뽑는다는 건, 그를 키우겠다는 의지라기보다는 그가 쌓아온 실력을 ‘소비’ 하겠다는 의미다.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이 뽑힌 이유를 빠르게 증명해야 한다. 진짜 문제는 그것을 의식하고 긴장한 그녀의 불안함이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음... 내가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줘도 불안해할 거잖아.

네.

내가 보아온 경험으로는, 너 같은 사람은 잘 해내. 보통.

왜죠.

늘 긴장하니까. 자만하지 않으니까.


마지막 날에 교토에 갔다. ‘후시미 이나리’라는 곳이 가장 근사했다. 이 곳은 해 질 녘쯤이 시간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천 개의 도리이가 안내하는 그 길의 적막함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B는 입구로 들어섰다기보다, 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낯설고도 신비로운 세계가 입을 크게 벌리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 그녀가 곧 들어설 그 회사처럼.
천 개의 도리이는 세상의 모든 잡음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켜주었다. 마침 해가 오늘의 마지막 빛을 도리이 사이로 틈틈이 밀어 넣었다. 해와 함께 관광객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 길은 온전히 그녀에게 열려있었다. 홀로 걷기 좋은 길이었다. 나는 잠시 떨어져 걸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외롭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새롭고 낯선 길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가, 결국 잘 해낼 거라는 걸. 그래도 불안할 땐 돌아봐, 등 뒤에, 내가 있다.

동그랗게 처진 그녀의 뒷모습은 말을 한다. 혼자 가볼게요. 너무 멀리 떨어지진 마시고.


너는 늘 불안하지. 잘 하고 싶어서 그래. 인정받고 싶어서. 잘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취약점은 늘 그걸 인정받아야 산다는 거야. 너는 누가 칭찬해 주기 전까지 한 번도 스스로 만족한 적 없을 거야. 그게 스스로 되지 않는 사람이거든. 사실은 니가 무척 좋은 걸 만들어 냈는데도 말이야.


나는 부장이 되어서야 차장의 불안함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차장’이라는 터널을 끝까지 걸어보고서. 터널의 가운데서 걷는 사람들은 늘 빛이 저 멀리서만 손짓하고 있는 법이다. 그녀의 불안함과는 달리, 사실 그녀는 내가 본 아트디렉터 중 가장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 칭찬은 친한 동료 어드밴티지도, 언니로서의 위로도 아니다. 그녀와 같은 회사에서, 그녀의 일을 가장 많이 본 사람으로서의 팩트다.


그 팩트를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말로 전달될 확신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상했다. 노련한 파일럿이 어느 낯선 공항의 활주로에 능숙하게 착륙을 하는 모습을. 그녀가 그렇게 하길 바란다.


남들 눈에는 모자랄 것 없는 경력, 특별해 보이는 말솜씨, 눈치도 머리도 손도 빠른 ‘잘 익은 아트 디렉터 차장’이지만, B가 내게만 보이는 불안함을 나는 안다. 동그랗게 말아진 그녀의 어깨에 매어진 긴장의 무게를 느낀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니어 직장인의 고달픈 일상을 본다. 너무 걱정은 마. 다들 비슷한 짐을 지고 걸어가. 걷다 보면 곧 익숙해질 거야. 칭찬을 한두 번 받으면, 조금은 가볍게도 느껴질 거야.


B에게 ‘부장의 딜레마’에 대해선 미리 예고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의 내 뒷모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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