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하는 노동도 있다
'설거지'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 얇은 책으로 나오면 더 좋고.라고 말했다가 옆자리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았다. 커피를 한잔 두고 소소한 대화를 하는 자리였다. 아무도 읽지 않지만 어쩌다 읽게 되면 코웃음을 내다가 결국 설거지를 글로 마스터하게 되는 책. 설거지를 할 때마다 그 깔끔한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책. 물론 이 부분은 말하지 못했다. 그의 비난이 더 강력해져서.
사람들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을 네가 재미 삼아 글로 쓰겠다는 거냐. 심지어 책으로 내겠다는 거냐. 그럼 사람들이 얼마나 욕할지 알긴 하냐. 마치 내가 설거지에 대한 글을 실제로 쓴다면 우리 집 문 앞에서 시위라도 할 듯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어릴 때부터 요리를 못했다. 지금은 충분히 어른이지만 여전히 요리는 하지 않는다, 못해서 안 하고, 안 해서 더 못해졌다. 요리 고자의 악순환. 언젠가 노력이라는 것을 마음먹고 해 보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내가 요리를 못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감정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내겐 요리가 오히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하는 노동'이었다.
굼뜨고 허둥대는 두세 시간을 소비하고 십오 분 남짓 그것을 삼킨 후 앉아있으면, 늘 허탈함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인간은 왜 매끼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러나 누가 해준 밥을 먹고, 요리실력을 뽐내며 한껏 더럽힌 주방과 그릇들을 '씻을'때면 늘 기분이 좋다. 뽀드득의 희열을 느끼며 신나게 닦다 보니 네 자매 가족의 설거지 담당은 늘 나였다. 결혼을 해서도 나는 설거지 담당, 남편은 요리 담당이다.
평생의 설거지 담당인으로서, '주방의 일'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인 설거지는 어느덧 내 인생에 기분 좋은 루틴, 깊이 있는 리추얼로 자리 잡았다. 설거지를 하는 행위의 순서, 과정의 효율, 에너지 절약, 미학적 정돈, 그 시간 동안의 사색 혹은 멍. 나아가 '모든 잘 씻김'의 희열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 연구한다.
고무장갑을 끼는 순간의 비장함을, 좋은 수세미가 주는 장비의 위대함을, 순백색 거품 목욕을 하고 대기하는 그릇들의 정렬을, 기름진 접시가 뽀드득 마찰력을 되찾을 때의 손맛을, 먼저 헹궈지는 그릇으로 생기는 작은 폭포 아래 다음 그릇이 초벌로 씻겨지는 효율을, 마르기 좋은 순서로 정돈된 그릇들의 자세를, 때론 식기세척기 안에 잘 맞춰진 도열을, 완료된 식기세척기의 문을 열었을 때 확 오르는 김의 폭발을, -그때만큼은 빵을 굽는 이가 오븐 열 때의 설렘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식기세척기를 쓸 때 '한 판 굽는다'라고 말한다.- 설거지가 끝난 싱크의 반짝임을, 그리고 그릇들과 더불어 어지러운 심정까지 함께 씻겨진 기분을 나는 사랑한다.
언젠가 '연필깎이'에 관한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읽지는 못했지만 글쓴이의 의도에는 공감이 갔다. 연필깎이에 대해 그리 진지한 사람이 있다면, 설거지에 대해 나처럼 진지한 사람도 있지 않을까. 누구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세상에 단 한 권 밖에 없는 책이면 어떤가. 누가 아나, 지구가 멸망하고 새로운 종족의 시대가 왔을 때, 그 책이 운 좋게 남아 구시대인들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교재로 쓰일지.
그냥 그런 생각을 했었다. 설거지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은 그렇게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 네가 별것도 아닌 것을 써서 남들에게 욕을 먹을까 걱정되어 그렇다. 는 말까지를 듣고 나는 더 이상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가 한바탕 욕을 먹고서야 설거지 이야기는 끝이 났다.
대화가 끝나고 어김없이 남은 설거지는 내가 했다. 머그컵에 그가 댄 입술자국을 힘주어 벅벅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