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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Nov 24. 2020

기쁘다 한글 타자기 내게 오셨네!

타닥타닥 손편지를 쓰자

내가 없던 몇 년 동안 한국에는 많은 역사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촛불집회, 정권교체도 그렇지만 핀테크의 시대가 열렸고, (상하이에는 이미 정착된 시스템이라 한국 핀테크에도 곰새 적응했다) 온라인 중고 시장이 훨씬 커졌다. 당근마켓은 이미 모두의 앱이었다.


한국에 언제까지 있을지 아직도 모르지만 그 앱은 깔아 두었다. 이유는 단 하나. 오직 한글 타자기를 구하기 위해서. 키워드도 설정해 두었다. '한글 타자기'. 알림은 생각보다 자주 울렸다. 처음엔 당근! 당근! 할 때마다 만화 속 당나귀처럼 귀를 세웠다. 하지만 제주도 도민들이 올리는 제품 대부분은 '인테리어용'. 나는 몇 년째 실사용 가능한 타자기를 찾고 있었다. 올라온 제품 대부분은 영혼 없는 미녀들이었고, 그나마도 들어가서 보는 사이에 이미 예약 중이거나 판매 종료. 역시 구하긴 어려운 것인가.라고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울린 당근! '실사용 가능한 한글 타자기'. 그것도 내가 사는 동네. 사진으로 보니 상태도 아주 좋았다. 제품에 대해 상세한 것들을 물어볼 틈도 없이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제가 살게요!'를 채팅창에 외쳤다. 내 생애 첫 중고거래였다.


동네 유니클로 주차장에서 접선 약속을 했다. 스파이 영화 속 요원처럼 긴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중요한 물건을 건네받기로 했으니까. 살짝 떨리기도 했다. 마침 파란색 박스를 들고 있는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핵무기도 마약도 아닌 그저 80년대 타자기가 든 박스. 긴 머리와 잔꽃무늬 롱스커트, 마스크 위로는 반짝이는 셰도우까지, 예쁜 사람이 예쁘게 간직했던 파란색 타자기였다.


그녀는 타자기를 쓰고 싶었지만, 그저 고이 모셔두었다고 했다. 고맙다. 덕분에 상태가 너무 좋았다. 족히 30년도 넘었을 제품인데 풍파 없이 고운 세월을 보낸듯했다. 무생물에도 그런 팔자가 따로 있나 보다. 오래되었지만 정갈하고 단정했다.


꽃가마에 공주님 태우듯 조심조심 모셔와 설레는 마음으로 타자기 뚜껑을 열었다. 새 주인의 손길로.

명조체 자음과 모음이 정갈하게 늘어선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한글로 먹고사는 카피라이터라 그런지 한글에 애정이 많다. 이상하지. 태어나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물건인데 이게 그렇게도 갖고 싶었다니.


그렇게 3년 만에 마침내 내게 온, '실사용 가능하고 예쁘기까지 한' 타자기.

마라톤 사의 1000DLX 두벌식 타자기
이 아이를 갑자기 얻은 게 신기해서 사용법 같은 건 보지 않고 타작기 얼굴만 오래 보았다
내가 현재 쓰고 있는 노트북 두벌식 키보드의 조상님이시다. 자리를 새로 외우지 않아도 되니 감사할 따름.
내 분신, 맥북과 새로운 프레셔스 그리고 아웃포커스 된 조카의 '종이 스테고사우루스' , 책상 위 프레셔스 삼합

이제 타자기로 편지를 쓸 테다. 창가 옆에 따뜻한 커피를 두고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마음속의 단어들을 종이에 새겨봐야지.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면 손편지만큼 정성 담긴 편지를 고이 접어 전해야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이 타자기로 좋은 소설 필사도 해야지. 타자기로 쓴 종이를 엮어서 나만의 책도 만들어 봐야지. 상하이에서 '종이책'을 구할 수 없다면 내가 E북을 보며 한 장씩 쳐서 내 전용 종이책을 만들어야지. 하고 싶은 일들이 넝쿨처럼 이어졌다. 낭만적이었다.


깨끗하게 닦은 자판 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자 이제 편지를 쓸 차례다. 우선 연습부터 해볼까.

문득 '고향의 봄'이 생각났다. 그....런데...앗. 어. 응? 아니, 받침은 왜 아래 안 붙고 옆에 붙나요??

하. 타자기 치는 것은 정말로 쉽지가 않았다. 


내가 너무 취해있었다. 내 로망에. 자음과 모음과 받침이 합체되는 기본부터 익히는 게 우선인데.

노트북 키보드처럼 쉽게 생각하다니. 애국가로 일단 연습하세요. 지나가던 조카가 말했다. 


동해의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쳐보자.

크리스마스쯤이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100타는 나올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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