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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23. 2021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부모

619-13번지 8화. 태, 가족을 떠나다

@류병석 지음   


52년생, 현 70세.

나의 아버지.

이것은 아버지가 써내려가는 자전적 소설이다.




해방된 해였다.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항복했다. 모두가 기뻐했다. 원골에서 시집온 새댁은 순산해 떡두꺼비 같은 증손자를 장골댁에게 안겨주었다. 장골댁은 천하를 얻은 것마냥 즐거웠다. 나라는 해방되고 증손자도 얻었으니. 장골댁은 이웃을 돌아다니면서 손자 내외와 증손자를 자랑했다. 40대 후반 증조할머니가 된 장골댁의 행복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손자 태는 20대도 안 되어 아버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열여덟 남짓의 원골 새댁은 시할머니 말 잘 듣는 손자며느리가 되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이나 할 말인가. 40대 후반의 증조모와 18세, 19세의 부모라니. 참으로 애가 애를 낳은 꼴이다. 아마도 소꿉장난을 하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일본의 처녀 공출 피해 시집와 갑작스럽게 아기엄마가 되었으니...!      




게다가 그 무렵 손자 태는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양자 올 때는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호강시켜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공부도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8살에 양자 온 동네는 두메산골에다 아랫말 윗마을 해서 20가구 정도로 배울 곳이 없었다. 공부는커녕 겨우 지게 멜빵 걸어주면서 나무나 해오라고 시키니 두메산골에서 태가 느끼는 회의감은 점점 커졌다.      


태는 어린 나이에 양 할머니가 결혼을 시켜서 하라는 대로 했지만, 덜컥 이게 아니다 싶었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어린 나이에 자식을 낳고 보니 눈앞이 캄캄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까지는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하고 살았지만, 더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라도 해방되었으니,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속으로 나가려니 가진 게 너무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도 몰랐다. 정직하게 살아서는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태는 생각다 못해 사바리골에는 벼를 심고 요골의 500평 밭에는 양귀비를 심었다. 불법이고 투기와도 같았지만 우선 돈을 벌어서 한번 잘살아보고 싶었다. 다행히 양귀비 농사는 들키지 않았고, 잘 키워서 뿌로커를 통해 팔았다. 태는 산골에서 농사지어서는 꿈도 꾸지 못할 돈을 한 뭉치 만지게 되었다. 태는 여전히 꿈을 꾸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항복하고 해방은 되었지만, 같은 민족끼리 다투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자와 민주주의 강대국들의 논리에 한반도 위쪽에는 공산체제가 들어서고 남쪽은 미군정이 다스리게 되었다. 위쪽은 러시아 힘을 빌러 김일성이, 남한에는 이승만이 미군정 하에 나누어 살림을 차리게 되면서 모든 게 혼란스러워졌다. 그 속에서도 태는 변화된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양할머니인 장골댁과 아내인 원골 새댁, 그리고 아들을 떠나 태는 중소도시로 나갔다. 가족을 떠나 두메산골을 벗어난 태에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태는 시내에 가게 터를 하나 사서 판잣집을 짓고, 장사를 시작했다. 산골에서 살다가 사람들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곳에 가니 태 역시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사람 냄새는 태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 시절에는 물자가 귀해 그저 물건 몇 가지 떼어와 파는 수준이었지만 그럼 어떠하랴. 소꿉장난 같은 장사도 재밌기만 했다.     


사실 태는 죽골 집을 나올 때 오간다 소리도 하지 않았다.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집을 나왔으니 어떻게든 성공해 보란 듯이 돌아가고 싶었다. 가게를 차릴 때, 태는 주변 사람에게 총각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나이도 20대 초반이었으니 그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젊은 총각을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았다. 총각 혼자 가게를 하고 있으니 여자를 소개해주었다. 처자식이 있다고 말하지 못한 태는 한 여성과 동거를 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말도 안 될 일이지만, 그 시대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죽골에서는 장골댁과 원골 새댁, 아들 그 누구도 이런 사태를 모르고 있었다. 어딜 갔는지 소식도 없이 집을 나갔으니 손자와 남편이 어떻게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말로는 무단 가출이다. 그냥 무턱대고 집을 나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고 성공해보겠다고 한 태였다. 큰 뜻을 품고 나왔건만 결국 딴살림이라니.   

  

태에게는 동거녀가 그래도 시골에 있는 부인보다 세련되고 말이 통하는 여자였다. 여자와 함게 꾸려나가는 상점은 조금씩 나아지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는 비밀이라는 건 없다. 죽골에 들통이 나버렸다. 사실을 알게 된 원골 새댁은 난리가 났다. 그러나 장골댁은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 시대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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