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떠나는 24일간의 파리 여행 (12)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가다

by 문준희
1052670_473315626090886_1882624893_o.jpg

#1 빈센트 반 고흐가 보고 싶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고흐 형이 보고 싶었다. 왠지 오늘은 고흐 형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실은 파리 중심가를 벗어나 근교를 나간다고 했을 때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고흐 형의 무덤이기도 했고, 슬슬 파리 중심가가 익숙해졌기에 파리보다 낯선 곳에 잠들어있는 고흐 형이 더욱더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고흐 형이 잠든 곳으로 가기 위한 아무런 정보가 내겐 없었다는 거다. 그래서 숙소에서 제공하는 와이파이에 휴대폰을 연결한 뒤, 블로그를 검색했다.


어느 누리꾼의 블로그에는 RER-C1을 타고 가다, 종점에서 한 정거장 앞에 있는 <St-Quen l'Aumone> 역에서 내려 국철로 갈아탄 뒤, 네 정거장쯤 가다 보면 <Auvers sur-Oise> 역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하차하면 된다고 쓰여 있었다. 덧붙여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생각보다 작아서 일단 동네까지 가기만 하면, 고흐의 무덤까진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가 자신 있게 써놓은 블로그 글 하나만 믿고, 역 정보만 숙지한 채, 아침을 챙겨 먹고 지하철을 탔다.


다운로드.jpeg
다운로드 (1).jpeg

#2 RER 기차를 타고, 파리를 빠져나가다


파리에 온 뒤, 처음 타 본 RER은 2층으로 된 기차였다. 파리 중심가를 벗어나, 외곽으로 나가니 현대식 건물들이 눈에 띄었고 차창 밖으로 문화시설이라곤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아! 이 나라도 수도에 문화 쏠림 현상이 심하구나!' 싶었다. 하긴, 파리에 온 첫날 드골 공항에서 루아시 버스를 타고 오며 창밖으로 보았던 파리 외곽의 초라한 풍경에 얼마나 실망했던지...!!! 다시금 그날이 떠오르며, 지난 1주일간 파리 문화에 취해 현실감을 잃었던 것이 새롭게 환기되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어느덧 <St-Quen l'Aumone> 역에 도착했다.


다운로드 (2).jpeg
다운로드 (3).jpeg
다운로드 (4).jpeg
다운로드 (5).jpeg

#3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에 도착하다


<St-Quen l'Aumone> 역에서 <Auvers sur-Oise> 역으로 가는 기차는 1시간에 1대 꼴밖에 없었다. 환승 타이밍이 안 맞아 40분을 역사 안에서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역사라고 해봤자, 4~5평의 작은 공간이었다. 파리 1,2 존과는 다른 낯선 풍경과 아랍 형님, 아프리카 형님들이 많이 있어서 조심스레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안심되었고 이내 괜찮아졌다.


내 마음속에도 '잘 모르는 문화권에 대한 경계'가 심하구나 싶었다. 상황 알림 LCD 디스플레이에 열차 시각이 다 되었음이 표시되자, 계단을 올라 ‘C’라고 쓰인 플랫폼으로 나왔다. 파리 지하철 노선도에 ‘H’라는 심벌로 표시된 노선의 열차를 타고, 고흐 형님의 동네로 출발했다. 도심을 완전히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자연이 풍부한 중세 시대 모습의 프랑스가 나타났다. 새로운 정서를 맛보며 차창 밖의 풍경을 구경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드디어 고흐 형님이 잠든 <Auvers sur-Oise> 역에 도착했다.


다운로드 (6).jpeg
다운로드 (7).jpeg
다운로드 (8).jpeg
다운로드 (9).jpeg

기차에서 나와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사는 노란색 벽면에 아기자기한 그림이 걸려있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역에서 나오자, 바로 앞에 고흐 형의 모습이 그려진 카페가 보였고, 왼편엔 그나마 번화가인 듯 보이는 동네 거리가, 오른편엔 포도를 먹는 
동상과 함께 휑한 도로가 보였다. 나는 왼편에 있는 동네 거리로 걷기 시작했다. 파리 중심가와는 다른 동네 모습에, 마치 그림 속 세상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리저리 주변을 살펴보며 걷고 또 걸었다.


다운로드 (10).jpeg
다운로드 (11).jpeg
다운로드 (12).jpeg
다운로드 (13).jpeg

#4 동화 속 세상에서 빵 맛에 반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몰랐는데,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와, 대체 이 신선한 공기의 맛은 뭐지?’라는 생각과 함께 유기농 산소가 내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왔다. 파리와 확실히 비교될 만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니, 금방 배가 고파져, 빨간색 외관의 빵집에 들어갔다. 파리 중심가에 비해 전반적으로 빵 값이 저렴했다. 나는 ‘허니 시나몬’ 하나를 구입해서 거리를 걸으며, 무심코 한입 베어 물었다. 기똥차게 달달한 무언가가 내 혀에 닿는 느낌과 함께 바로 없어졌다. 미각이 덜 발달된 나조차도 정신이 번쩍 들만큼 맛이 좋았다. 최고의 빵맛을 맛보며,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나는 아기자기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걸어가는 쪽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길 왼편에 고흐 형이 그렸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시청’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흐 형은 죽기 직전 3개월도 채 안 되는 70여 일을 이 동네에서 보냈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7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으니, 얼마나 그의 창작력이 대단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고흐 형은


마을 중앙에는 고흐 형의 흔적을 찾기 편하도록 게시판에 '안내지도'가 붙어있었다. 나는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흐 형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헉! 이럴 수가!’ 내가 걸어오던 방향과는 반대로 걸어야 무덤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 반갑지 않은 사실 앞에 힘이 쭉 빠졌지만, 이번에는 방향을 정확히 숙지한 채,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만나는 동네 주민들에게 재차 물어보며, 고흐 형의 무덤으로 향하는 언덕까지 왔고, 다시 한번 힘을 내어 걸음을 재촉했다.


다운로드 (15).jpeg
다운로드 (14).jpeg
다운로드 (16).jpeg
다운로드 (17).jpeg
다운로드 (18).jpeg

#5 오베르 교회 그림에 나온 실제 교회를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왼편에 고흐 형이 그린 ‘오베르 교회’ 그림 사본과 함께 실제 그 그림 속 ‘오베르 교회’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무덤을 찾아 이 곳으로 왔지만, 그림으로 익숙한 ‘오베르 교회’의 실제 모습은 마냥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잠시 무덤도 잊은 채, 한동안 교회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온 관광객을 둘러보면, 은퇴한 일본인 부부와 나이 지긋한 파리지앵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일본어와 불어만 서비스 중인 곳이 대부분이었고, ‘오베르 교회’ 안내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어는 기대도 안 했지만, 영어 서비스도 없는데 일본어가 서비스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몹시 충격이었다.


19세기부터 일본문화가 유럽 사회에 먼저 시나브로 전파된 것이, 그 작은 차이가, 21세기 프랑스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적잖이 놀라웠다.


다운로드 (19).jpeg
다운로드 (20).jpeg
다운로드 (21).jpeg
다운로드 (22).jpeg

#6 밀밭의 장관에 감탄하다


교회를 지나 표지판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얕은 오르막이 나왔고, 오르막을 지나자마자 '밀밭'장관이 펼쳐졌다. 너무 아름다웠다. 그 어떤 예술도 이만한 감흥을 내게 주지 못했던 거 같다. '아 이거 혼자만 보기 너무 아까운데'라는 말이 저절로 내 입에서 나왔다. 여기에서 여행이 끝나도 크게 아쉬울 것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비가 오다 말다 하는 흐린 날에도 이 정도면, 맑은 날 왔으면 기절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이라니. ‘밀밭’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태어나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사진으로는 감동의 10분의 1도 담기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밀밭을 지나, 도착한 묘지 안에는 수백 명이 잠들어 있었다. 묘지가 생각보다 넓어, 고흐 형의 무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앞서 방문한 여행객들에게 물어, 간신히 고흐 형이 잠든 곳으로 왔다. 고흐 형은 자신을 아낌없이 후원했던 친동생 테오 형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대학교 2학년과 4학년 때 고흐 형이 동생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2권의 책을 보았었다. 그 당시 내가 고민하던 문제들의 실마리가 고흐 형의 편지 속에 담겨 있었고, 큰 도움을 받았었다. 어쩌면 나는 고흐 형의 그림보다 글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 책에는 고흐 형이 (익히 알려진) 지금의 화풍을 습득하기 전, 무수한 습작 시절의 작품도 순서대로 실려 있어, 이 형이 얼마나 후천적으로 치열하게 노력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끔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형 앞에 서니,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한 형과 조우한 것처럼 털썩 주저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물론, 나 홀로 ‘혼잣말’로 하는 이야기였다. 예전에 고마웠다는 둥, 한반도 중에서도 반으로 딱 갈라진 남쪽에서도 형의 편지가 책으로 나와 읽힌다는 둥,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한 말들도 다 털어놓았다. 지나가던 동유럽 커플 중 남자분이 그런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줬다.


다운로드 (23).jpeg
다운로드 (24).jpeg
다운로드 (25).jpeg
다운로드 (26).jpeg

#7 반 고흐 형과 대화하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해서, 우산을 쓴 채 20분 정도 이야기를 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 질문을 하나 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형님 제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 과연 어떻게 써야 할까요?

고흐 : … …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뒤돌아서며 걷는 그 순간, 뇌에 전율이 오며 어디선가 음성이 들렸다. 신기하게도 한국말로 들렸다.


고흐 : 내 그림을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고?

: 예

고흐 : 고마운 일이지만, 그럼 뭐 하냐?

: 예?

고흐 : 야, 준희야. 시간을 어떻게 쓰냐고? 내가 말해줄 수 있는 한 가지는 너란 존재는 죽기 전까지의 시간 동안만 산다는 거다.

: … …

고흐 : 죽고 난 뒤의 불멸의 명성보다, 살아있는 단 하루가 소중한 거야.

: 그, 그럼 그 소중한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걸까요?


고흐 : 사랑하는 것을 사랑해라! 신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굴지 말고!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 즉시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 맘껏 사랑해! 사는 동안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아. 네가 망각하고 살다 보면 금방 이리로 오게 될 거다.

: 아……



고흐 : 한 가지 확실한 건 넌 20세기 후반에 태어나,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리로 온다는 거야. 잠든 나에게 21세기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언젠가 잠들 너에게 22, 23세기도 그런 걸 거다. 21세기의 어느 순간. 딱 거기까지가 네가 의식하며 살 수 있는 너의 시간이야. 그런데 뭘 망설여?


나 : 아... 형님 감사합니다.


고흐 : 사랑하는 걸 사랑해! 신 앞에 겸손하고! 시간이 없어!


1052760_473316826090766_1258515253_o.jpg

#8 무덤을 나와 숲에서 길을 잃다


무덤을 나와, 고흐 형의 가르침이 뇌리를 가득 울릴 때, 나는 숲에서 길을 잃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고, 말 한 마리가 언덕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동물 모형인가 싶어서 계속 쳐다보며 걷는데, 그 녀석의 목이 돌아가고 눈이 깜빡였다. 물리적으로 낯선 존재에 당황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숲 속엔 동물소리가 여기저기 사방에서 들리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네오 나치 비슷한 복장과 문신을 한 커플이 불도그와 셰퍼드를 끌고 내 옆을 지나갔다.


이젠 좀 무서워졌다. 휴대폰 안테나는 터지지 않고, 이 곳에서 나 하나 없어진다고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다행히 차를 타고 이동 중이던 아줌마가 길을 알려줘, 쫓아오는 개와 동물소리를 피해 달리고 또 달렸다. 이 동네의 중심 거리가 어느덧 모습을 드러냈고, 신기하게도 그 순간 비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나를 반겼다. 곳곳에 사람들이 보이자, 나는 양팔을 벌려 햇살을 느끼며, "아 고흐 형님! 정말 살아있단 건 좋은 거군요!"라고 되뇌었다.


다운로드 (27).jpeg
다운로드 (28).jpeg
다운로드 (30).jpeg

#9 마카롱을 먹으며 글을 쓰다


시내로 나가는 다음 기차까지 1시간이 남아, '허니 시나몬'을 사 먹었던 빨간색 외관의 빵집에 들러, 마카롱 6개를 색깔별로 구입했다.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마을을 다시금 찬찬히 둘러보았다. 관광객이 많은 역사 바로 앞 카페는 내키지 않아, 시청 건물 옆 조용한 카페에 들러 커피와 함께 마카롱을 먹으며 오늘의 에피소드를 메모하고, '오랑주리와 모네 미술관을 방문했던 지난날'을 복기하며 글을 썼다.


기차 시간이 가까워져, 다시금 역사로 향했다. 오늘 하루,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대학 시절, 고흐 형이 쓴 편지 모음집을 읽으면서도 실제로 내가 이 곳에 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고흐 형이 생각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물여덟, 삶의 기로에 서있는 내 고민에 대한 해답과 영감은 이미 대학 시절 읽었던 고흐 형의 편지 모음집에 나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많은 부분을 까먹었지만, 나의 뇌 어딘가에 몇 구절이 저장되어, 나를 이 곳으로 이끌었던 건 아닐까? 무덤 앞에서 나눈 고흐 형과의 대화는 철저한 나의 독백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을 누군가가 이해해주고 지지해주었으면 하고 바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흐 형과의 가상의 대화가 내게 정말 큰 힘이 됐다.


다운로드 (31).jpeg
다운로드 (32).jpeg
다운로드 (34).jpeg
다운로드 (33).jpeg


고흐 형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파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 곳으로 올 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p.s2

<처음 떠나는 24일간의 파리 여행>이

[한 번쯤 파리로 떠나도 괜찮아]라는 책으로 나오게 되어,

브런치에 "프롤로그", "에필로그", 일부 "에피소드"를 제외한 글은

비공개로 전환하였습니다.


http://m.bookk.co.kr/book/view/17284

△ 위의 링크에 가시면

기존 온라인 연재물에서 내용 보강과

수많은 '퇴고'를 거쳐서 나온

수다쟁이쭌의 첫 책

[한 번쯤 파리를 떠나도 괜찮아]를

종이책으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yes24.com/24/Goods/39464018?Acode=101

△ YES24에서 만나보실 분들은 위의 링크로 가시면 됩니다 ^^


독자님들께서 작은 관심을 주신다면,

지속적인 작업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 )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처음 떠나는 24일간의 파리 여행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