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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희 May 06. 2017

내가 살아가는 이유

삶의 의미, 그리고 행복의 비밀

"실례지만,  사나요?"

 

몇 년 , 뜬금없이  사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니 그냥 태어났으니까, 살아가는 거지.  사냐니그러고 나서 한참을 생각해보니, 진짜 '사는 건가!?' 싶었다. 나아가  질문을 끌어안고 지내다 보니, '인간'이란 어차피 생명이 유한하고, 시간은 정직하게 흐르고, 그래서 늙고, 언젠가는 병까지 들고, 결국엔 소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가?' 대한 생각으로 발전했다.

 

20세기에 태어난 대다수의 사람들은 녹용을 먹고, 홍삼즙을 마시며, 종합 비타민과 가시오갈피를 섭취하고, 헬스 트레이너에게 체계적인 건강관리까지 받더라도, 22세기를 살아서 맞이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간혹 가다 20세기 끝물에 태어나, 22세기의 시작을  수는 있겠으나, 3세기를 턱걸이로 간신히 걸치고 가는 거지, 온전한 상태로의 체험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죽을 텐데… 진짜 나는  사는가?" 누구나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품게 되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재미' 쫓으며 사느라,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몇 년  뜬금없는 타인의 질문을 통해 사유하다 보니 나름의 사는 이유가 생겼다.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딱히 이유랄 것도 없었는데후천적으로 이유를 만든 거다.

 

 경우에는 "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걸  못해봤기 때문에어떻게든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산다." 싶었다. 상투적인 이유였다. 대체로 하고 싶은  하면서 살았기에, 하기 싫은 걸 하는 느낌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하기 싫은  억지로 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살맛'이 안 나기 시작하면서,  사는지 그제야 느낌이 왔다.

 

인간 살아야  '의미' 있기 때문에 산다.  의미란 게 저마다 다를 거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배경, 가족 구성원과 목표, 나라와 인종, 장소가 전부 다르기 때문에, '의미' 같을 수가 없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을 견디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자신만의 사는 '의미' 발생한다.

 

 의미란 게 어떤 이는 거창하게 '세계 평화' '억만장자'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선인장 가꾸기'처럼 소박한 것일 수도 있다. 가치와 크기를 떠나서, 사람마다 살아가는 본질적 '의미' 제공하는 무언가가 각자에게 있는데우리는 불행하게도 그걸 소유하고 있을 때는  모른다. 상실해봐야, 잃어봐야 비로소 ', 그게 나를 살게 했구나!' 깨닫는다.

 

'삶의 본질적 의미' 되었지만,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을 상실했을 , 인간은 그걸 다시 되찾거나, 유사한 거로 대체라도 해야 '살아지고, 살아가진다.' 만약, 의미가 되었던걸 아예 되찾지 못하게 되거나, 조금의 희망조차 없어진다면, (육체적, 생물학적으로 훨씬  시간을 생존할  있음에도)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런데 의미가  무언가를 되찾지 못하거나, 희망이 사라져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그런가? 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삶의 의미' 다른 것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인간은 '삶의 의미' 잃으면 소멸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럼   나아가, 의식하건 안 하건 '의미'때문에 사는 것은 알겠는데, 이토록 불행하다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행복은 어떻게 하면 얻을  있는가?"

 

이건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보다 간단했다. … 스스로가 '삶의 의미' 느끼는 것에 시간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충만케 되면 행복해지더라. 그러나 지금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워낙 커져서, 사람들이 '삶의 의미' 느끼게 하는 것에 시간을 아주 많이 노출하기가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대체로 의미 느끼는  '' 안 되는  확률이 높다. 아니, 돈과는 무관한, 돈으로   없는 것일 가능성이 높은 거다. 그런데 실제로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없게끔 이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의미' 느끼는  '저건'대, 뭘 하든 돈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저것'과는 무관한 '이걸'하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실제로 돈을 아예 배제하고, 삶의 많은 시간을 '의미'만으로 채웠을 때, '경제적 궁핍' 또한 행복을 앗아간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로움은 말과 글로는 쉬우나, 좋은 방향성을 가지고 하루하루 진하게 실천하며 살기는 기적에 가깝다.


상황이 이럴진대, 그렇다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언제, 어느 때나 가능한  '삶의 의미' 두면 된다. 특별한 , 특별한 장소, 특별한 누군가, 거창한 무언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아주아주 소박한 것에 '삶의 의미' 두고, 자주 그것에 노출하다 보면, 점점 행복해진다.

 

말은 쉽지만, 그렇게 되면 남과 비교하는 것을 배제하는 용기 필요해서, 유년기 때부터 경쟁과 줄 서기식 비교에 노출된 우리나라의 현 상황에서는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이, 내년이, 앞으로가 어떨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스미디어가 조장하는 '거대한 환영' 삶의 의미를 두느니, '소박' 의미를 두고, 하루하루 행복한 것이 낫지 않은가 싶다.

 

각성하고 살지 않으면,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하는 대부분의 패턴이, 고도화된 여러 마케팅 수법에서 발생한 지식에 무분별하게 노출된다. 기록되는 것에는 이상이 담기는데, 자본이 투여된 마케팅은  '이상적 가치'를 더욱더 달콤하게 만든다.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달콤한 판타지 속에서 사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나 살면서 안 힘들다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객관적으로 좋아 보이는 사람들도, 누구나 힘들어하더라. 자신에게 '삶의 의미' 준다고 믿는 것과 실제 삶과의 괴리 때문인데,  '의미'  진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욕망에서 '내가 나라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마케팅에 노출되어 최면에 걸린 건지, 한 번쯤 깊이 사고해 볼만하다.

 

이런 걸  떠나서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엄청난 것에만 [삶의 의미] 지닌 사람이, '엄청난 ' 소유하거나 경험했을 때 발생하는 '세로토닌'이나, 별거 아닌 것에도 [삶의 의미] 있어서 사소한 것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발생시키는 '세로토닌' 비슷하거나 같다는 거다. … 아무리 문학적이고,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사유나 사색, 논리를 펼친다고 해도, 행복할 때는 고작 '세로토닌' 분비하고 있을 이다.

 

그러니, 사소하고 자질구레하지만 소중할  있는  '삶의 의미' 두고, 자신의 시간을 그것에 자주 노출시켜,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하는  행복 아니겠는가 싶다. 졸라 거대하고 멋진 것에만 의미를 두면서, 스스로의 육체에게 '세로토닌' 분비의 달콤함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게 하며, 혹사시킬 필요가 있나 싶다.

 

세상의 어두움과 힘듦만을 강조하며, 삶을 우울하게 만드는 모든 담론을 거부한다. 이렇게라도 세로토닌을 분비시키며, 살고 싶은 아름다운 '삶'이 지구 곳곳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산꼭대기에 있는 물건을 발아래로 옮길  있는 초능력은 인간에게 없지만, 우주 높은 곳에 있는 '삶의 의미' 겸손하게 발끝까지 낮출  있는 '매직' 누구에게나 있다.

 

심지어, 지금 당장 가능하다.


남과 비교하며, 세로토닌을 분비시키지 못하느니, '매직' 사용해, 내일이라도 자신에게 세로토닌을 선물로 주는 것은 어떨까, 싶다. [불로초] 같은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역사가 친절히 알려주는데,  당장 가능한 것을 외면한 , 인간은 불로초 같은 것만 쫓냐는 말이다. 그러고는  불행하다 외치냔 말이다.

 

매직, 매직매직…!

당신에게 세로토닌과 포스가 늘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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