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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희 May 08. 2017

21세기 열정 폐인 청년 탄생기

열정 페이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부활

태초에 고용 신이 있었다. 여러 세대를 고용하고, 내보내면서, 수십 세기가 흘렀고, 고인돌부터 이케아까지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며, 고용 신은 한 가지 법칙을 깨달았다. " '자본'을 투자한 만큼, '시간'과 공을 들인 만큼, 결과물의 '퀄리티'가 올라간다." 어떤 시절에는 그것이 가설이라 주장한 이들도 있었지만, 만유인력의 법칙만큼이나 세계적인 진리로 통용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자본'을 그다지 투자하지 않았는데도, 높은 '퀄리티'를 내는 신인류가 출현한 것이다. 쥐꼬리만 한 자본을 투자하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시간'을 더 내고, 날밤까지 새며 결과물의 '퀄리티'를 올리고 있었다. 고용 신은 그들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다. 어디서 이런 기인들이 출현했는지 반가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으니, 그 신인류는 바로 열정맨, 열정걸이었다.


고용 신은 최소한의 자본을 들이고, 최대한의 결과물을 뽑아내는 열정맨, 열정걸의 비결이 궁금해졌는데, 곧 쉽사리 해답까지 얻을 수 있었다. 비결은 말 그대로 '과도한 열정'이었다. 앞서간 지난 시대 마스터들의 결과물을 보며, 언젠가는 자신도 저런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으며 버티고 견뎌내며 생성된 바로 그 '열정'이었다.


열정맨, 열정걸들을 오랜 세월 관찰하며 고용 신은 그 '과도한 열정'의 탄생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탐구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열정은 '판타지'와 '꿈', '이상' 따위에서 온다는 것을 말이다.


자본을 적게 주는데도 높은 퀄리티를 내면서, 자기들이 알아서 시간과 공까지 들이니, 열정맨, 열정걸들은 고용 신에게 있어 최고의 기쁨을 안겨주게 되었다. 이런 신인류가 탄생한 시대에 무한한 영광과 감사를 돌렸다. 그래서 고용 신은 이런 열정맨, 열정 걸이 계속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하게 되었다.

 

교육/미디어를 잘 다루어, '판타지', '꿈', '이상'이라는 조미료를 곳곳에 뿌렸더니, 해가 바뀌어도, 어디선가 또 다른 열정맨, 열정걸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었다. 가끔씩은 그들 중 한 두 명의 열정맨, 열정걸을 스타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 해에는 수십 배나 많은 열정맨, 열정걸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열정맨, 열정걸에게 고용 신은 어느 날부턴가 '열정 페이'라는 걸 주기 시작했다. 실체 없는 자본 혹은 자본 없는 실체였는데, 도가 지나치지 않을까 싶어 고용 신은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사회 초년생인 열정맨, 열정걸에게는 생각보다 잘 먹혔고, 간이 커진 고용 신은 바야흐로 '무급 인턴'이라는 시도까지 하게 되었다. 


이게 웬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맨, 열정걸은 제 발로 찾아왔다. '판타지', '꿈', '이상'이라는 조미료는 이토록 힘이 센 것이었다. 고용 신은 기원 전후를 통틀어 이토록 풍성한 만족감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정맨, 열정걸의 생산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들이 제 발로 찾아오니, 이보다 더한 고용 프로세스는 없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열정맨, 열정걸들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눈 밑 다크서클과 함께, 가슴에 '번아웃'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자신을 비난하러 찾아왔던 것이다. 자기 발로 찾아와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하게 해주었는데, 이제 와서 자신을 원망하며 떠나는 그들을 고용 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열정맨, 열정걸들은 그렇게 자유를 찾아, 이스탄불로, 아테네로, 파리로, 피렌체로, 헬싱키와 바르셀로나로 낯선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하며 길을 떠났다. 그들은 여행지에서 만난 대학생들에게 '열정 페이'의 실체에 대해 공유하기 시작했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전문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꽃집이나, 카페를 열거라고 떠들어댔다. 미래의 열정맨, 열정걸이 될 대학생들은 어느덧 '열정 폐인'이 되어버린 그들을 통해 판타지를 벗어내기 시작했다. 


고용 신은 점점 자신을 제 발로 찾아오는 열정맨, 열정걸이 줄어듦에 불안함을 느꼈다. 그만한 피고용인들이 없었는데, 이제는 찾기가 몹시 어려워진 것이다. 열정맨, 열정걸이 양성될 수 없을 만큼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었고, 자신을 도왔던 미디어도 '열정 페이'라는 단어가 트래픽 상승에 도움이 되니, 고용 신을 적으로 가차 없이 돌렸다. 


양성되는 열정맨, 열정걸보다, 자신이 내보낸 '열정 폐인'이 많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고용 신의 근심은 나날이 깊어간다. 고용 신은 열정 없는 청춘이 싫어진다. 자본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인 만큼 나오는 정직한 퀄리티가 몹시도 불쾌하다. 왜 요즘 것들은 저리도 열정이 없는가. 그 시절의 열정맨, 열정걸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아아, 이제 열정 페이가 더는 먹히지 않는 것인가? 열정 페이는 이제 몰락한 것인가? 


한참을 원망하고, 분노를 쏟아내자, 귀가 간지러워진 행정 신도시의 초이노믹스 선생은 2015년 고용 신에게 선물을 바친다. "아이고, 고용신님 열정 없는 것들을 쉽사리 내칠 수 있게 해드릴게요! 사업 접지 마세요!" 고용 신은 솔깃하고, '과한 열정폐인을 만든다고 자각'한 과거의 열정맨, 열정 걸들은 또 불안하다. 언제 내쳐질지 모르니, 이제 다시 열정을 부활시킬 때가 아닌가 하고. 끊임없이 생각에 잠긴다.


열정 아닌, 열정 같은, 열정 비스름한 것이라도, 온몸에 가져다 붙여보지만 샤워를 하며 문득 깨닫는다. <내일의 죠>가 미덕이 된 시대는 갔노라고. 이젠 새하얗게 태울 때가 아니라, 초저금리, 장기 불황을 어떻게든 버틸 때라고.


그럼에도 침대에 누워 다시 생각에 잠기다, 마음을 고쳐 잡는다. 내일은 다시 열정을 내봐야지. 쉽사리 부활하지 않을 열정인 걸 이젠 알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살고 싶으니까. 어머니보다 먼저 갈 순 없으니까. 그건 불효니까.


겨울은 스치듯 지나가고, 이미 봄은 찾아왔는데, 온기 하나 없는 열정은 이토록 서럽게 부활한다.




p.s

본 이야기는 [열정 페이], [무급 인턴] 등 청년의 '열정'을 악용하게 만드는 불합리한 제도적 허점을 풍자하고자 만들어진 '픽션'입니다. 국가 차원의 제도적 개선과 고용주 분들의 합리적인 '유급 인턴'채용이 정착되기를 원합니다.


p.s2

작년 하반기 기준, '국회의장 정책수석실' 자료에 따르면 최저임금 이하 임금을 받는 만 15∼29세 열정페이 청년노동자는 2013년 3월 45만명에서 2016년 3월 63만명으로 3년간 18만명 늘어났습니다.


[참고1]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72263

[참고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8&aid=0003602820

[참고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4&aid=0003726169

[참고4]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9676

[참고5] http://www.joongbo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162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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