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병원에 가요

오늘의 밥값 42 / 우리는 더 나은 나를 만나야 해요

by 수달씨


한 달쯤 전부터 언니의 권유로 약을 먹고 있다. 의사 말로는 불안을 낮춰주는 약이라고 했다. 사실 어떤 어떤 약이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자세히 들었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을 먹은 이후의 변화를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게는 꽤나 낯설고 유의미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치 자갈밭 위를 흘러가는 물처럼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로 얕고 넓게 그저 흘러 다녔다. 작년 여름 홍수가 지나간 뒤 방치된 우리 동네 다리 밑 개울가의 모습처럼. 돌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지고 가물면 쉬 말라버리는 그 얕은 물가처럼.

지금은 그 자갈밭에 주변 큰 돌들을 모아 물길을 만든 것과 같다. 얕은 물이 아닌 (뱀이나 작은 용 같은) 통통하고 깊이감 있는 물이다. 이 물이 길을 따라 꿈틀꿈틀 흘러간다. 길이 내어준 방향을 따라 천천히, 올곧이 간다. 주변으로 새어나가는 물은 이제 거의 없다. 아직은 좁지만 유의미한 움직임, 그리고 나아감.


예전의 나는 책을 읽으며 동시에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고 생각에 빠졌다가 글을 썼다. 그 모든 것을 동시에 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앞에는 음악이나 영화를 틀어놓고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했다. 세상 모든 것에.

그럴 땐 어느 것 하나도 내 것 같지 않았다. 손안에 가득 담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많은 일을 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바빠 살아도 내게 남아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초라했다. 늘 벌거벗은 듯했다.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 같았다. 덜 중요한 것들을 쫓느라 중요한 것을 모두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너무 싫었다. 내가 싫었기 때문에 칭찬에 고팠고 그럴수록 외로웠다.


요즘 나는 책을 읽을 땐 책을 읽는다. 차를 마실 땐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을 땐 음악만 들린다. 풍경을 볼 때도, 새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림을 그릴 땐 그것이 끝날 때까지 온전히 집중한다.

설거지를 할 땐 오롯이 설거지만 한다.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있지만 그대로 두고 하던 일을 한다. 오직 눈 앞의 그릇을 닦는다.

그럴 때 그 일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된다. 바삐 해내서가 아니라 온전한 힘을 썼기 때문에 나는 온전한 보람을 느낀다. 내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누가 나를 좋아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 온전한 시간 속에 존재할 뿐.


이것이 약의 힘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먹겠다. 평생도 먹을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 수치심과 죄책감과 초조함 속에서 보낸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서라도 나는 이제 뭐든 할 수 있다. 그게 약을 먹는 일이라면 너무 쉽잖아. 동은이의 복수*보다는 훨씬 쉽지 않은가요.


그러니, 여러분. 아프면 병원에 가요. 몸이든 마음이든. 약을 지어먹어요. 당신은, 우리는 더 나은 나를 만나야 해요. 더 온전한 나를. 처음 만나는 나를.



‘오! 나에게는 더 큰 삶, 더 큰 자유가 있어!

자연스러운 삶이 있어.’

- <자기 돌봄>(타라 브랙 지음) 중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 학창 시절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한 동창들에게 되갚아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생과 시간을 다 바쳐 철저한 복수를 준비한다.



수달툰-시골집에 산다 / 인스타그램 @sudalcine


202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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