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오늘

by 수달씨


백화점이 문 여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오전 10시 반 정각에 들어갔다. 5층은 여성복 매장. 아직 여름을 본격적으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곳은 벌써 가을톤의 얇은 외투들을 마네킹마다 입혀놓았다. 백화점의 시계가 우리의 실제 체감보다 한 달 이상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메카인 이곳도 기후변화와 길어진 여름, 많아진 강우를 반영할 만큼 유연한 시스템을 갖진 못했나 보다.

마음에 드는 옷이 몇 벌 있지만 예전처럼 쉽게 지갑을 열지 못하고 돌아섰다. 비싼 물건도 거침없이 사던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잠시 그렇게 살아보았을 뿐. 그래도그 허영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보았기 때문에 지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해보아야 알게 되는 것들이 반드시 있다.


여름휴가 계획을 짜고 있다. 가족과 함께 하는 휴가가 아닌 나만의 휴가. 일 년에 두어 번은 나 홀로 여행을 떠난다. 깔끔한 1인실이 있는 숙소 위주로 검색한 뒤 버스 편으로 방문하기 좋은 곳으로 정한다. 도보 거리에 바다나 산책로, 또는 시간을 보낼 만한 카페가 있으면 좋다. 뚜벅이라 멋들어진 관광지를 가지는 않고 주로 마을을 둘러보고 서점이나 카페를 찾아가고 책을 읽는다. 이번에는 남해의 몽돌해변을 낀 작은 마을에 있는 숙소를 점찍어 두었다. 8월이 되기 전까지는 작업이 없을 터, 본격적인 성수기에 접어들기 전에 다녀오리라 마음먹고 2박 예약버튼을 눌렀다.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의 비 피해가 심각하다. 그 와중에 우리 동네는 큰 탈 없이 지나갔는데, 그렇다고 좋아할 수는 없다. 내가 휴가를 위해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그 길 곳곳, 삶의 터전을, 혹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로서 애도의 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큰 피해를 남기도록 방조한 이가 있다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정말이지 며칠 만에 파란 하늘을 보았다. 뜨거운 태양이 습기를 밀어내고 길 가는 이들의 살을 태운다. 오늘 매일같이 챙기던 우산 겸 양산을 두고 나가는 바람에 나도 광합성을 잔뜩 했다. 해를 못 봐서 우울하다고 했던 내 지인들도 오늘은 해를 잔뜩 쬐었길 바란다. 밀린 빨래도 하고, 창을 활짝 열어 묵은 습기도 털어내고.


여름의 한 낮, 창문으로 산 위에 걸린 구름 한 조각을 바라보며 글을 적는다. 그리 대단치 않은 하루지만. 비가 그친 것만으로도 평소와 다른 오늘이 되었다. 요즘 메일을 보낼 때 적는 끝인사로 마무리해 본다.


“무더위에 몸, 마음 잘 챙기시고 좋은 여름날 보내세요.”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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