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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Apr 23. 2020

어쩌다 관계 디톡스

이제 쉬는 맛을 조금 알 것 같다


전염병이 온 공기를 뒤감고 있는 시절이다. 굳이 밖으로 나갈 일도, 누구를 만날  일도 만들지 않는 요즈음.
사람을 만나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약속을 잡아 누군가를 만난 지 아마 열흘이 넘었을 듯. 내 몸에서 타인의 기운이 빠져나간다. 마치 욕조에 몸을 푹 담가 나쁜 기운을 내보내듯. 내 영혼이, 내 몸이 서로에게 온전히 깃들도록.
타인이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내 몸을 나의 기운으로 채울 줄을 몰랐을 뿐이다. 어쩐지 그리움 같은 것은 별로 없다. 특정한 욕망들은 떠올랐다가, 잠깐 애달팠다가, 다시 가라앉힌다. 지금의 나, 온전하고 가볍고 편하다.
하지만 두려움은 있다.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너무 연해진 살은 다시 상처 입기도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관계로 아프고 죽고 싶은 마음은 안 들겠구나. 누군가의 삶에서 한번 죽어보니, 내 삶에서까지 나를 죽이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그런 문제로는. 내 삶 안에서는 내가 결정하고 싶다. 내가 정말로 어쩌지 못하는 문제는 따로 있고, 그것들을 처리하는 데만도 바트다. 그러니까 관계만큼은 이제 내가 결정하자.
햇빛 좋은 오후. 이제 쉬는 맛을 조금 알 것 같다. 집에서조차 쫓기듯 초조했었는데,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려고 노력 중이다. 쉬고 또 쉰다.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다. 대단한 일, 하지 않아도 좋다. 언젠가 하고 싶어 지면 그때. 그 날을 위해 쉬어둔다.


20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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