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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Apr 23. 2020

내 마음의 회계연도

겨울은 움직이기 힘든 계절이었어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도 2020년 새해에 많은 일들을 결심했었다. 기존에 해오던 요가와 평일 채식(지향)을 조금 더 단단하게 지키고 싶었고,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감상을 더 잘 기록하고 싶었다. 시골로 이사 온 후 모든 계절을 보냈으니 이제 시골생활에 대해 글로 남길 때가 왔다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가장 원대한 계획은 출판사업자를 내는 일.
그러나 원체 생각과 행동이 느린 데다 우울의 기운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온 힘을 쓰느라 실은 그저 살아내기에도 빠듯한 1,2월이었다. 일 없는 비수기, 집이라도 정돈되면 마음이 좀 쉬어질까 싶었지만 그마저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몸과 마음 모두 움추러들게 하는 시골집의 겨울 추위. 보일러가 들지 않는 창고방에 버리고 싶거나 버릴까 말까 고민되거나 숨기고 싶은 물건들을 대충 쌓아놓았더니 한 짐이 되었다. 이제는 무엇이 보관하려던 물건이고 무엇이 버리려는 물건인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렀지만 2월 중반이 지나도록 창고방 문을 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냥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마음먹고서야 창고방을 째려보는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애초에 1,2월은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계획하기에 적당한 계절이 아니다. 새해에 원대한 포부로 세웠다가 지켜주지 못한 결심들로 좌절하는 일, 누구나 겪어봤으리라. 하지만 그건 우리의 나약함과 끈기 없음 때문이 아니었다. 새해의 결심들이 지켜지기에는 무수한 방해공작들이 줄을 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가 바뀜과 더불어 다이어리를 새로 구입하고, 여러 가지 결심 리스트를 적어놓는다. 운동과 식단 관리, 여행이나 목돈마련을 위한 저축, 어학공부, 대부분 '당장' 시작해야 의미 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그리고 적잖이 몸을 달금질해야 하는 일들. 하지만 1월에는 어쩐지 스스로 겨울방학을 주고 싶은 나머지, 계획에 없는 휴가나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연말에 왜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못 만난 사람들이 있다면 왠지 모르게 새해에는 봐야 할 것 같다. 작년에 고생한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기도 하고, 설 연휴도 있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괜히 더 생각하게 된다. 그 많은 명절 음식과 겨울 먹거리는 또 어떤가.
무엇보다, 겨울은 춥다. 추우면 마음이 움추러들고 몸을 움직이기 싫은 게 인지상정(어쩐지 윗 문단의 상황과 모순되지만 사실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도, 계획을 세우기에도 에너지가 적당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집 화목보일러도 많이 추운 날에는 나무를 아무리 때도 방이 따뜻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만큼 움직이는데 품이 드는 계절이라는 거다.
그걸 이제 알았다니. 겨울은 움직이기 힘든 계절이었어. 2월이 다 지나도록 마음속으로 전전긍긍했던 시간들이 아깝다. 해마다 작심삼일로 좌절했던 이십여 년간의 수진이가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그때의 수진이들에게 '네 탓이 아니었다'는걸 알려주고 싶다.
이렇게 바꿔보기로 했다. 내 마음의 회계연도는 3월이라고. 1년 내내 달려온 내게 새해가 됐다고 바로 달릴 것을 명령하지 않을 테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고 구들장 위에 지친 몸을 부려놓는 농사꾼처럼 1,2월은 에너지를 비축하는 마음의 안식 월로 삼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2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렇게 마음먹자마자 내일 새로운 회계연도의 시작이라니. 그래도 다행히 오늘이 4년에 한 번 있는 윤달, 2월 29일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달의 신이 하루를 벌어주었다. 선물 받은 2월의 마지막 하루, 진짜로 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진심 어린 말을 전한다. 그리고 당신들에게도. 올 겨울 잘 버티고 살아내주었구나.
그리고 새해는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새 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3월이 됐다고, 여름이 왔다고, 한 것도 없는데 가을이 왔다고 초조해하지 말자. 새해, 어디 안 간다. 그리고 이번 새해에 못하면 어때. 고맙게도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또 다른 새해가 오는걸. 자꾸자꾸 새해는 오니까 나와 당신의 결심, 좀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전에 겪어보지 못한 질병과 함께 3월을 맞았다. 지금까지 살아낸 것처럼 지혜를 모아 함께 살아내길. 가혹한 시간이 지나고 깨끗한 봄을 맞이하길. 4년 만에 찾아온 달을 보며 두 손 모아 본다.



202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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