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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May 03. 2024

지우개


이런 나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를 평생에 걸쳐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딱딱하고 무겁고 갈수록 때가 묻어 자신이 지워야 될 것들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우는 일은 팔만 아프고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지만, 그렇다고 퍽 깨끗해지지도 않지만, 지우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그게 지우개의 사명이다. 어느 날 닳고 닳은 몸으로 드디어 지우는 일을 멈출 수 있을 때를 생각한다. 지우개가 지나온 길은 얼룩덜룩한 흔적만 남았다. 꽤나 고단했을 것이다. 종종 부서지고 찔리고 패였을 것이다. 온몸에 멍이 들었을 것이다.


지우개는 생각한다. 고급스럽고 부드럽고 가볍고 잘 지워지는 지우개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고단한 지우개질 따위 필요 없는 다른 것으로 태어났다면. 저기 저 아름다운 나무나 산 같은 것이었다면. 아니 애초에 태어나질 않았더라면.


지우개는 눈물이나 시원하게 흘려볼까 하고 제 몸을 쥐어짜 보지만 말라비틀어진 몸에 수분 따윈 없다. 물이 나올 구멍도 없다. 차라리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 할 일을 찾는 것이 낫겠다.


오후 두 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 간식으론 꿀떡이나 찹쌀떡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집 앞 방앗간으로 떡을 사러 간다. 90년대 가요를 들으며 아이를 기다린다. 음악은 신나는데 왠지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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