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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Aug 04. 2024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좋은 책을 읽다가도, 자신이 왜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갖지 않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면 거의 기분이 좋지 않게 된다. 그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도 생각해 보지만 대체로는 내가 가진 일종의 콤플렉스 - 나도 아이 있는 삶을 원하지 않았어 - 라든가 아이가 있음으로 인해 불편해지거나 양보되어야 하는 내 삶의 어떤 부분들이 여전히 아프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그들을 대하는 불편한 기분은 온전히 나 때문이라고,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여러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불편하여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불편하다. 그러니까 결혼이나 육아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 말이다. 그 ‘이유’는 대체로 육아에 자기 삶을 양보하기에는 자신의 그릇(에너지 혹은 성격이나 품 따위)이 크지 않다는 식으로 표현되는데, 사실은 그냥 양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또는 이런 가부장제 하에서는 도무지 그 선택을 할 수가 없다고 선언하여도 좋을 것이다. 자신의 그릇 크기로 치부해 버리면 나는 꼭 이러고 만다. ‘누구는 뭐 그릇이 커서 이러고 살고 있나.’ ‘아이 혹은 누구를 돌보는 데에 꼭 그릇이 커야만 하는가.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인데. 그럼 동물을 키우는 건 왜 가능한데? 동물이랑 사람을 나눠선 안된다면서?’라는 생각까지 기어코 가고 만다. 그릇 차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생각들이 비혼과 기혼, 비육아와 기육아를 양분하고 가르는 기제가 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좋지 않다. 이 문제는 우리끼리의 싸움이 아니어야 한다. (나의 그릇이 아니라 배우자, 지역사회, 국가의 그릇도 포함된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린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택의 이유가 그릇이나 품이나 성정이나 성격 때문이 아니다. 삶 속의 다양한 선택지 중의 하나나 두개 혹은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선택들 중 일부일 뿐이고 살면서 여러 번 바뀔 수도 있다. 비혼이지만 기육아일수도 있는 것처럼. 물론 기혼-비혼은 왔다 갔다 할 수 있지만 육아는 한번 선택하면 꽤 오랫동안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 있고 그건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삶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동물을 키우고 있다면 이미 그릇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키울 수 있지만 사람은 안돼, 라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충분히 고민하여 결정하고 책임감을 가지면 그뿐이다.


연애/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이를 갖거나 갖지 않거나, 동물을 키우거나 키우지 않는 데에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으면 한다. (동성을 사랑할지 이성을 사랑할지, 둘 다 사랑하거나 둘 다 하지 않을지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다른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고 상대화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를 키운다고 더 잘나지도 않았고, 온전한 나로 살고 있지 못한 것도 아니다. (아이가 포함된 나로 살고 있는 것뿐이다. 조용필 노래 제목처럼 그 또한 내 삶이다.*) 아이를 키우지 않는다고 마냥 자유롭고 쿨하게,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살고 있냐고 물으면 정말로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는 것은 뭐든지 어렵다. 각자의 자리에서 애써 살고 있는 우리를 다 같이 보듬을 순 없을까.


오래도록 고민해 온 이 문제에 대해, 조심스러워서 발화하지 못한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본다. 언젠가 다양한 이들과 이야기해 볼 기회가 닿는다면 내 생각에 오류가 없는지 점검해보고 싶다. 내 글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 <그 또한 내 삶인데>, 조용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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