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가 끝나자마자 미용실을 예약했다. 미용실 예약, 병원 예약 같은 일을 좋아하지 않는데(어려워 한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이제는 예약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
비용도 있고 시간도 많이 걸리니 최대한 참고 참았다가 뿌리염색을 하는 편. 이제는 검은 머릿속 눈에 띄는 새치가 신경 쓰여서 참기가 더 어려워졌다. 미용실 실장님께 물어본 바로는 흰머리는 뽑는 것보다 차라리 가위로 자르는 편이 낫다고 한다. 흰머리가 자라는 모공에서는 어차피 다시 흰머리가 나오고, 계속 뽑으면 언젠가는 더 이상 모발이 나오지 않게 되어 결국 머리숱이 적어질 뿐이라고. 나는 가위로 자르려다 곁의 (소중한) 검은 머리까지 자르게 될까 봐 그냥 놔두곤 한다. 때 되면 오늘처럼 염색으로 덮을 수 있게 두피가 오래 버텨주길 바랄 뿐이다.
미용실 거울 속 내 얼굴은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낯선 모습이다. 앞머리를 내려 집요하게 가려온 내 이마라인과 눈썹과 눈두덩이를 선명하게 확인한다. 벌거벗은 느낌이다. 원숭이형 이마라인도(엄마와 똑같다), 두텁고 처진 짱구형 눈썹도(아빠와 똑같다), 움푹 꺼진 눈두덩이도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귀도 너무 납작하게 뒤로 붙어있어 평소에는 잘 드러내지 않는 편. 화장은 어차피 하지 않아 늘 맨얼굴이지만 염색약을 두른 채 ‘올빽’ 머리를 하고 있는, 40대 중반을 향해가는 나의 거울 속 민낯을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적응이 되지 않는다.
머리를 감고 와 다시 앉았다. 어린 미용사의 정성 어린 지압과 두피 마사지를 받고 있노라면 오늘 쓰게 될 몇 만 원이 아깝지가 않다. 힘 있게 꾹꾹 누르는 손가락 악력을 느끼며 몇 만 원을 벌기 위한 이들의 노동의 무게와 그 대가를 생각하곤 한다. 다시 거울 속에는 한층 개운해진 모습의 나. 염색도 잘 되었고 전문가의 손길로 다듬어진 앞머리가 다시 내 이마와 눈썹을 가려준다. (편-안.) 미용실 드라이어로 정돈된 머릿결을 찰랑이며 거리로 나온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걸 알면서도 왜인지 더 젊어지고 에너지가 차오르는 듯한 기분. 2월의 첫날 첫 소비를 미용실로 택한 건 잘한 일이다.
영화 <서브스턴스>* 속 끔찍한 장면들을 보며 속으로 ‘잘못했어요 언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외모지상주의 안 할게요, 외모로 나를 깎아내리지 않을게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게요...‘ 두 손 모아 빌어놓고도 여전히 나의 늙어감, 나의 민낯, 나의 맨 이마(?)를 확인하는 것은 흔쾌하지 않다. 늘 운동과 식단에 연연하며 이것은 ’다이어트‘가 아닌 ’건강 관리‘라고 주장하지만 순간순간 내 안의 외모지상주의를 확인하곤 한다.
그래도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드러내고 인정하면서 나이를 먹어간다. 한국인들이 동시에 두어 살씩 어려지면서 나이를 대충 얼버무릴 수도 있게 됐다. 그래서 몇 살이세요? 하고 물어오면 “사십 언저리예요.” 하고 눙치곤 하는데 그마저도 알마 안 남은 것 같다.
뭐, 이제는 많이 내려놓았다. 잠깐 집 앞엘 나가도 큐티뽀짝하게 옷차림을 꾸미는 걸 좋아하던 내가 이제는 추리닝(‘운동복’이라고 써야 하지만 ‘추리닝’이라고 써야 정확한 느낌이 든다.) 바람으로 어디든 다닌다. 40대 아줌마에게 누가 뭘 기대하나 싶다. 물론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꾸미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제는 꾸며진 모습으로 평가받는 것을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몸과 외모가 자원이 아닌 것은 의외로 편하다. 나는 이 편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동안 꾸미고 그 안에 숨느라고 고생했으니까.
이야기가 길어졌다. 미용실에서 시작에서 외모지상주의로 이어져 이틀 만에 마무리. 나의 글은 지금처럼 늘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럴 땐 “뭐, 어때.”라고 생각한다. 새해 첫 글도 이렇게 마음대로 달려간다. 뭐, 어때. 올해도 이렇게 갈 지자로 달려(걸어) 보자구.
*아마도 2024년 최고 문제작. 늙은 자신의 몸을 혐오하는 한 배우(데미 무어 분)가 젊은 자신의 몸(마가릿 퀄리 분)을 만들어내며 겪게 되는 무시무시한 일들을 파격적인 영상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