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3월에 들어서 두 가지 버킷리스트를 메모했더랬다. 구례 산수유마을 가기, 창덕궁 홍매화 보기. 봄 감기로 기운이 달려서 예약했던 구례의 숙소는 울며 겨자 먹기로 취소하고, 몸이 나아지는 사이 봄이 훌쩍 다가왔다. 서울보다 일주일 계절이 늦거나 빠른 (봄, 여름은 늦게 오고 가을, 겨울은 빨리 온다) 시골동네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 작년에 벚꽃인지 헷갈려했던 매화 가지에 동그란 꽃눈이 달리더니만 드디어 팝콘처럼 하나씩 터지기 시작했다. 구례 산수유는 못 봤지만 마을길 어느 집 마당에 핀 산수유꽃을 처음 봤다.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창덕궁 후원 예약이 쉽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다 목요일인 오늘 불현듯 움직이기로 했다. 후원에 못 가면 어때. 나는 창덕궁 홍매화만 보면 된다.
야무지게 도시락을 싸 가방에 넣고 버스를 타고 나섰다. 오늘은 특별히 좌석버스다.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큰길은 온도가 높은지 볕이 좋아서인지 꽃이 빨리 핀다. 톨게이트 근처에서 산수유 군락을 만났다. 구례 안 가도 되네. 그래도 내년에는 꼭 가야지 하고 다짐한다.
산 넘고 물 건너 (실제론 전철로 땅속을 지나) 창덕궁에 도착. 역시나 꽃천지다. 경복궁은 가봤는데 창덕궁은 처음이다. 입구부터 흰 매화나무, 미선나무, 영춘화(동네에서 개나리인가 하고 사진 찍었던 노오란 꽃무리가 이 녀석이었다. 새로운 꽃이름 득템!)... 하얀색 노란색 연분홍색이 이어지는 정원 한쪽에서 드디어 홍매화를 만났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만개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서 동글동글 귀여운 진분홍 꽃눈이 올망졸망. 거다란 대포같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는 전문가 포스의 아저씨들 사이로 스마트폰을 디밀어 사진을 찍어본다. 봐도 또 봐도 예쁘다. 만개하면 얼마나 예쁠까? 그때쯤 다시 와야지.
외국인들이 봄꽃만큼 화사한 색색의 한복을 입고 걸어 들어가는 길을 따라 궁 안뜰로 들어간다. 점점 사람이 많아지는 듯하더니 후원 입구에 다다르자 수많은 무리의 관람객들이 우글우글 모여있었다. 그곳에 만개한 홍매화 두 그루. 인터넷으로 본 유명한 홍매화 사진들은 전부 여기서 찍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봄꽃계의 아이돌, 창덕궁 홍매화를 드디어 영접했다. 사진을 좀 찍어보려는데 이번에는 대포 카메라보다 사람들이 문제였다. 삼삼오오 매화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일행들 틈을 비집고 빈 곳을 노려 카메라를 들이대 보는데 쉽지가 않다. 어떻게든 사람이 없는 매화나무 사진을 오롯이 찍어보려 했지만 유명 관광지의 포토존이 된 듯 매화나무는 끊임없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 내가 졌다. 어느 순간 포기하고 사람이 함께 담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나란히 서서 손하트를 하는 할머니들, 누가 봐도 꽃단장을 하고 모인 여고동창 느낌의 중년 여성들, 왕이나 조선시대 공주의 복장을 하고 서로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는 외국인들.. 나이, 성별, 국적을 막론하고 꽃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한결같다. 곳곳에서 까르르하고 터지는 웃음소리들이 봄볕 아래 터지는 꽃망울 같다. 이들도 꽃이 아닌가. 추운 겨우내 웅크리고 이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남았을 우리도 다 꽃이 아닌가.
사진은 충분히 찍은 것 같다. 무리를 벗어나 꽃이 적어 한적한 낙선재 쪽으로 이동했다. 화려한 홍매화가 없을 뿐 여기도 산수유, 매화나무를 볼 수 있는 정원이 있다.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에서 꽃향기가 묻어난다. 바람이 진한 꽃향기를 실어 나른다. 어떤 향수나 디퓨져로도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다. 문득, 사진은 이 향기 이 바람을 담지 못할 텐데 하고 생각한다. 나무 사이를 바삐 다니는 새의 지저귐도. 아련한 향수도. 봄은 눈 뿐만 아니라 코로, 귀로, 피부로 만나야 진짜 봄이다. 뭐든지 직접 와서 봐야 하는 이유다.
도시락을 싸왔는데 궁 안에서는 음식물 섭취가 안된단다. 어릴 적 궁궐로 소풍 갔던 기억만 생각했는데 많이 달라졌구나. 밖으로 나오니 돌담 건너편에 공원이 보인다. 원서근린공원은 제법 크고 운동시설도 꽤 잘 되어있다. 식후 커피를 즐기는 직장인들이 두런두런 모여있는 커다란 나무 옆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비둘기들이 부스러기라도 얻으려는 듯 다가오는데 너희 줄 것은 없단다.
건너편 궁궐에서는 일 년에 몇 안될 빅 이벤트를 왁자지껄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이곳 공원에서는 운동을 하고 도시락을 나눠먹고 산책을 하는 일상이 펼쳐진다.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가지 장면,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드는 감상은, 역시나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거다, 행복이란 것은. 산수유마을은 못 갔지만 창덕궁 홍매화로 충분히 행복해진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