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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Sep 22. 2021

학원을 다닐걸 그랬어

오늘의 밥값 17 / 나를 용서하기

"어릴 때 학원을 좀 다닐걸 그랬어."


추석날 밤, 마흔 살 딸이 모처럼 만난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왜 그때 나를 학원에 보내지 않았어? 라고도 말했던가.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자랐던 게 아쉬워. 미술학원이라도 다닐 걸. 칠십을 바라보는 엄마는 알듯 모를듯 한 표정을 짓는다. "네가 가고 싶지 않아 했어~" 맞다. 그때의 나는 학원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지 않았다, 라는 건 지금에 와서 든 생각이다. 피아노는 지겨워 금방 그만뒀고 태권도는 무서워서 갈 엄두도 안 냈다. 언니는 컴퓨터 학원도 다녔는데, 하지만 나는 컴퓨터도 무섭고 싫었는 걸.

학교와 공부밖에 모르는 나로 자란 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겁이 많았고 잘 못하는 일은 하기 싫었다. 집안 형편을 걱정해서 학원을 기피했다는 내 기억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부모가 학원을 보내지 않았다는 기억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이토록 겁이 많은 것이 학원을 다니지 않은 탓이라고? 순서가 단단히 잘못됐다. 태권도를 배웠더라면 좀 더 씩씩한 사람이 되었을까 라는 생각도 이제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때의 나는 그랬다, 단지 그뿐이다. 그때의 나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용서해야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 그때의 겁 많은 나를 용서하고 그다음 가난했던 부모를 용서하면 지금의 겁 많고 나약한 나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추석날,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 시절의 엄마와 딸과 용서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다.


2021/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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