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게 화내는 법

오늘의 밥값 24 / 나도 때로는 갑질이 하고 싶은 걸까

by 수달씨


며칠 전 일이다. 학교를 가려고 책가방을 메고 나선 아이가 마당에서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누군가 우리 마당 한쪽에서 웅크리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빨간 내의 차림의 할머니 한 분이 우리 차를 주차해두는 마당 입구 쪽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질경이의 씨를 받고 있었다.

평소 낯선 사람의 침투(?)나 이웃의 연락 없는 방문은 내게 큰 두려움이자 스트레스였다. 대문이 없는 우리 집 마당으로 당당히 들어와 현관에서 누군가 "계세요~?"라거나 "00 씨!" 혹은 "00 엄마~!"라고 부르거나 외치면 심장이 약한 나는 나는 매번 그 심장이 발등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이었다.

단단히 한 마디를 해주기로 마음먹고 바지춤을 허리까지 올려 입은 뒤 쿵쾅거리며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남의 집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돼요. 어서 나가세요!"

"아니 나 질경이 씨 좀 받으려고. 이것만 하고 갈게요."

"그만하시고 빨리 나가세요오오."

"이것까지만. 나 요 앞에 살아요."


말을 하는 중에도 마지막까지 질경이 씨를 터는 할머니를 밖으로 몰아내며(?) 나는 덧붙였다.


"제가 낯선 사람이 집에 오면 무섭고 불편해요. 누구라도 그렇잖아요. 이해해 주세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 가시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난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에 충만해졌다.

하지만 얼마 뒤 꼭 그렇게 화를 내야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위험하거나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존재도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 뭐 하세요? 아~ 질경이를 터시는구나. 그런데 여기는 남의 집이니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안돼요. 조금만 하시고 가셔요." 이렇게 잘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가끔 이렇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릴 때가 있다. 운전을 험하게 하고 굳이 이상한 길을 골라 달리는 택시기사, 집에 와서 자꾸 시주를 하라거나 길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사람들, 얼마 전 우리 집 앞에서 소변을 보려고 했던 아저씨까지. 이번 경우도 비슷한 케이스인데, 생각해보면 이들의 공통점은 불편하고 불쾌하긴 하지만 비교적 덜 해로운 경우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적당히 안전한 케이스에만 화를 내는 걸까. 정작 진짜로 위험한 상황은 피하면서 말이다. 물론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본능이고 나는 생존본능이 의외로 강한 안전 주의자일 뿐. 하지만 비교적 무해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화를 내고 나면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해댄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나도 가끔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갑질이 하고 싶은 걸까.


어떤 사람이 요령을 피우고 예외적인 혜택을 원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따지고 비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것은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니며, 또한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않는다. (스반홀름 홈페이지, 공동체 소개 중에서)


<나의 두려움을 여기 두고 간다>(하정, 좋은 여름, 2019)라는 책에 있는 문장이다. 스반홀름은 덴마크에 있는, 150여 명이 공동노동,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체라고 한다. 이 글을 보며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누구나 관계 안에서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한다. 나도 마찬가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실 대체로 무해하다. 누군가 나에게 언제든 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 뾰족하게 살아가면, 본인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이 그 뾰족함으로 타인에게 해를 입히게 될지 모른다.

나는 특히 '품위 있게'라는 말에 꽂혔다. 뾰족하지 않고 품위 있게 화를 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타인과의 소통 방식은 곧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기도 할 테다. '품위 있다'는 말을 어떤 허세나 도달할 수 없는 도덕성으로 해석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 말을 나와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품위 있게 먹고, 품위 있게 말하고, 품위 있게 살다 품위 있게 죽으면 어떨까. 결정이 어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궁금해질 때 작은 나침반처럼 '품위'라는 말 조각을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가끔 꺼내어보면 좋겠다. 때로는 품위를 내려놓고, 머리 끄덩이 잡고 싸워야 될 정도의 명백한 불의를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때를 위해 평상시에는 화를 조금 아껴놓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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