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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Jun 16. 2022

페인트칠을 했다

오늘의 밥값 25 / 걱정도 함께 칠했다


1년을 별러온 일이다. 아니 피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 집으로 올 적에 칠했던 침실 한쪽의 진회색 벽. 시멘트 벽이라 어쩔 수 없이 어둡게 칠했던 그 벽을 환한 파스텔톤의 그린으로 바꾸고 싶었던 게 1년 전이다. 핀터레스트의 예쁜 침실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컬러차트를 뒤지고 또 뒤져 느낌이 비슷한 색을 겨우 골랐다. 거금 칠만 원을 들여 페인트를 샀다. 그러고는 몸이 아파 못하고, 마음이 병들어 못하고, 점점 더 엄두가 안 나서 못하고... 그 사이 페인트는 창고에 방치된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동안에도 나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었던 것 같다.)


오늘 그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데에는 오분도 걸리지 않았다. 동네 카페에서 빵을 사 걸어오는 길에 갑자기. 비 온 뒤 습한 날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꼭 오늘이어야 했다.

모든 재료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작업복을 둘러 입고 서둘러 시작한다. 마음이 식기 전에. 숭덩숭덩 한 번. 꼼꼼하게 두 번. 깨끗이 말라 봐야 알겠지만 벽이, 방이 색을 입고 달라졌다. 오랫만에 맡는 수성페인트의 알싸한 냄새.

선풍기를 틀고 그 앞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쓴다. 칠하면서 그동안 내가 겁냈던 것들의 실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했는데 별로면 어쩌지?

- 하다가 너무 힘들어 몸이 아파지면 어쩌지?

- 하다가 가구며 침대에 페인트가 튀면 어쩌지?

- 짝궁이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쩌지?

- 갑자기 이사라도 가면 아까워서 어쩌지?

- 내가 후회하면 어쩌지? 후회하는 나를 내가 역겨워하면 어쩌지...


수많은 '어쩌지' 속에 숨어서 많은 시간을 지냈다.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겁이 많고 걱정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된 걸까. 이십 대 때 까지는 나름대로 저지르며 살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실수와 실패를 혐오하고 있었다.


오늘 칠한 건 그동안의 걱정들과 내가 나를 혐오했던 시간들이라고 믿는다. 페인트가 마른 뒤 바닥과 벽을 두른 비닐을 벗겨내면 짠 하고 내가 원했던 그 색깔이 나타날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별로면? 다시 칠하면 되지.





202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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