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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Jun 20. 2022

영화 <브로커>를 보고 문득 궁금해진 것

오늘의 밥값 28 / <어느 가족> 속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영화 <브로커>는 마치 감독의 전작 <어느 가족> 속 인물들의 시계태엽을 반대로 돌린 것 같다. <어느 가족>을 봤던 몇년 전, 한동안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식 세계관의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왔던 기억. 영화를 본 이후에도 오랫동안 마치 영화 속 인물들이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처럼 그들이 가끔 그립고 걱정되고 지금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하곤 했다.

<어느 가족>보다 더 이전에 만들어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보았을 때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한 가족, 혹은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들의 내밀한 속내와 무너져가는 일상, 미묘하게 어긋나는 불안들을 촘촘히 쌓아 올라가는 방식. 마지막에는 결국 무너트리기도 하고 불안함 위에서 새로이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여하튼 그의 방식은 대체로 불안과 파국과 해체를 향해가는 느낌이었다. 판타지에서 암울한 현실로, 선의 세상에서 다크 월드로 향해가는 기분이랄까. 그 가운데서 모호한 선악과 도덕의 경계를 경험하며 함께 불안을 파도 타느라 영화가 끝나도 그 여운이 몸에 깊이 새겨지곤 했다.

<브로커>는 어쩐지 이와 반대다. '불의'해 보이는 것들로 시작해, 꾸역꾸역 선을, 해답을, 해피엔딩을 찾아가려는 모습. 파편들에서 애써 공동체로 향해가려는 모습. 그래서 마치 <어느 가족> 속 인물들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감독은 이들에게 다른 시간, 다른 위로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쨌든 감독이 만든 세상이니 조물주로써 미안해서, 아니면 나처럼 감독도 그들이 자꾸 생각나서.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갈라놨던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속에 그들을 데려다 놓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무대도 일본이 아닌 낯선 한국땅으로 바꾸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며 말이다.




제목인 '브로커(맞춤법 검사를 하니 자꾸 '중개인'으로 바꾸라고 한다. 이들은 무엇을 중개하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의 의미도 해체된 세상 속에서 각자 분투하는 이들을  어떻게든 '연결'해주고 싶은 감독의 애정인 듯 하다. 배우 송강호도 배두나도, 아역배우까지 모두 서로가 서로를 연결짓기도 하고 연결당하기도 하며 이들은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중개인이 된다.

관객의 망상은 자유니까 이런 해석 또한 나의 자유. 어쨌든 나는 <브로커>를 보며 내내 <어느 가족> 속 가족들이 생각났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잘 살고 있을까. 꾸역꾸역 다시 만났을까. 해피엔딩을 찾아갔을까. <브로커>의 인물들이 어색한 여행을 꾸역꾸역 이어가듯. 아무튼 그들이고 이들이고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다. 태어나줘서 고마운 우리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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