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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Jun 22. 2022

어제 출발한 나로호는 우주 어딘가에서 가벼워지고 있을까

오늘의 밥값 29 / 머리에서 발로 내려오기


지금 떠오르는 생각이 망상인지 아닌지 알려면, 일단 눈앞에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쌓여있는 빨래를 갠다던가, 떡진 머리를 감는다던가. 아이의 숙제를 봐준다던가.

가끔 이게 아니면 큰일 날 것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사실은 매우 자주. 그것을 당장 실행하지 않으면 그 불씨가 내 안에서 사라질 것만 같아서 마음만 동동 구른다. 상상은 벌써 저만치 멀리 가서, 나는 그 아이디어로 세상을 다 얻었다. 그 상상이 너무 디테일해 내가 시작만 하면 모든 게 다 실제로 될 것만 같다.

하지만 당장 시작하기에는 걸림돌이 너무 많다. 쌓여있는 집안일, 배고프다는 아이, 나의 체력, 귀찮음, 돈... 막상 했는데 그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지레 걱정하는 마음.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우울해진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못해낼 거라는 생각에 순식간에 어둠의 동굴로 가라앉는다.

이것이 내가 수년간 앓고 있는 마음병-자기혐오와 우울과 두려움의 실체다.

오늘 아침, 역시나 설거지를 하며 떠오른 어떤 아이디어가 나를 사로잡았다. 오랫동안 해온 생각이라 너무 구체적이다. 당장 컴퓨터로 달려가서, 혹은 스케치북을 열고, 혹은 재봉틀을 켜고 작업을 시작하고 싶다. 나만 부지런하면, 내가 시작만 하면... 하지만 막상 두렵다. 또 망상이면 어쩌지.


나는 컴퓨터 앞으로 가지 않고 거실에 쌓여있는 빨래 더미 앞에 앉았다. 눈앞에 있는 나의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이걸 하고도 열정의 불씨가 꺼지지 않으면 그건 진짜다. 이걸 했다고 불씨가 꺼지면 그건 설익은 망상이다. 망상은 흘려보내야 한다. 진짜가 되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또는 그 아이디어의 아주 작은 한 스텝을 밟아보는 것도 좋다. (심리상담 영역에서 '스몰스텝'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권장되는 방법이다.) 그 방법으로 이게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아닌지 판가름되기도 하니까. 물론 그 한 번으로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나중에 또 생각나면 또 조금 해보면 된다.

요즘 나는 이렇게 글을 씀으로써 그 마음들을 휘발시켜 내 안에서 내보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딘가에 착지시키는 행위. 나는 가벼워지되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들을 어딘가에 존재시킨다. 문득 어제 하루를 떠들썩하게 한 뉴스가 생각난다. 그 바다를 떠난 나로호는 우주 어딘가에서 가벼워지고 있을까. 하여튼 우주는 뭐든 품어주니까. 그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나에게 글쓰기는 그래서 우주다. 미래에 어떤 것이 될지 몰라도 그냥 쓴다. 마냥 쓴다.


지금 쓰는 이 생각들은 최근 읽은 한 책에 빚졌다. <스님의 청소법>이라는 아마도 단종된 듯한 이 책은 중고 책방에서 천연재료로 하는 '청소법' 관련 책을 찾다가 발견했다. 나는 마치 부처가 거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이 책을 품에 끌어안고 집에 왔었다. 하여튼 이 책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지금 바로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먼 곳을 보지 말고 발밑을 보세요.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뭔지, 그것을 찾아봅니다.  

<스님의 청소법>, 마스노 순묘


그렇다. 스몰스텝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머리 꼭대기 위 망상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발 밑을 보라고 하는 스님의 목소리. 지금 내 발 밑에는 쌓인 빨랫감과 굴러다니는 장난감, 요금을 내지 않은 고지서들이 있다. 나는 망상의 꼭대기에서 내려와 오늘은 이것들을 우선 해결하기로 한다. 그렇게 한 계단씩 천천히 오르면 언젠가는 머릿속 그 생각들과 실제로 만날 날이 올까. 어쨌든 머리보단 발. 그걸 믿기로 하는 오늘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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