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달씨 Jun 28. 2022

비 오는 날 운동장에서

오늘의 밥값 30 / 학교라는 멀티버스


아이에게 우산을 가져다주거나 도시락을 보내기 위해 학교에 갈 때면 왠지 기분이 좋다. 뭔가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된 듯한 느낌과 더불어, 다 큰 어른이 되어 귀여운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면 느껴지는 여러 가지 추억의 맛.

귀여운 건물로 들어가 귀여운 교실들을 훔쳐본다. 창문 틈으로 내 아이가 긴 시간을 보내고 크고 살아가는 공간이 보이고, 몸은 다 컸는데 아직도 철이 덜 든 내가 보인다. 어른인 나. 어린이였던 나. 지금도 어린 나. 어린이인 아이들. 점점 자라 어른이 되어갈 아이들.

여러 시공간과 여러 군상이 발자국 찍힌 복도 위로, 운동장에 고인 빗물 웅덩이 위로 겹쳐진다. 마치 멀티버스 속 세상 위에 서있는 것 같다. 살아온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여기에 와 있지.

그럴 때 나는 생의 에너지를 느낀다. 신발주머니를 머리 위에 올리고 빗속을 뛰어가는 아이, 한쪽이 찌그러진 우산을 들고 가는 아이, 구령대에 앉아 우산을 갖다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아이, 운동화 대신 실내화에 맨발을 끼워넣고 깡총거리며 젖은 운동장을 걸어가는 아이들에게서. 나를 본다. 너희를 본다. 생을 본다.

비가 제멋대로 오락가락하는 초여름 장마. 가만히 있어도 습기가 찰싹 달라붙어 땀으로 내린다. 나는 우산 두 개를 들고 신발로 빗물을 차며 운동장을 걷는다. 살아있음이 벅차다.


2022/06/27

매거진의 이전글 어제 출발한 나로호는 우주 어딘가에서 가벼워지고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